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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는 시간 [2026.7~8] 노인의 안락사를 권유하는 섬뜩한 사회 <플랜 75>

 

노인의 안락사를 권유하는 섬뜩한 사회 <플랜 75>

20세기 말 할리우드에선 <인디펜던스 데이> <아마겟돈> <딥 임팩트> 같은 재난 블록버스터가 유행이었다. 혜성 충돌, 외계 침공, 자연재해 등의 이유로 지구 종말이 다가오고 우여곡절 끝에 미국이 지구를 구한다는 이야기. <딥 임팩트>에선 혜성과 지구의 충돌로 인류의 멸망이 예고된 가운데 생존을 위한 지하 요새가 건설된다. 요새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제한적이라 미국 정부는 입소자 선정 기준을 발표하는데, 인류 문명을 재건하는 데 필수적인 전문가 인력을 제외하곤 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선발된다. 다만 무작위 추첨에서도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55세 이상의 고령자다.

노인의 안락사를 권유하는 섬뜩한 사회 <플랜 75>
노인의 안락사를 권유하는 섬뜩한 사회 <플랜 75>

누군가에겐 이것이 혜성 충돌이나 지구 멸망이라는 비현실적 공포보다 더 직접적이고 냉혹한 공포로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재난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공리주의에 입각한 논리가 힘을 얻곤 한다.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겨진다. 인간의 가치가 사회적 유용성과 생산성으로 평가될 때 가장 먼저 배제되는 부류 중 하나는 고령자다.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는 약자가 우선 보호되지만, 사회가 붕괴할 위기에 처하면 약자가 우선 희생되는 비극이 발생한다. 위기 상황에서 인권은 쉽게 유예된다. 여기서 마땅히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다.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사회는 과연 정의로운가. <딥 임팩트>의 상황은 극단적 재앙에서 기인했지만,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플랜 75>는 나이를 기준으로 한 생명의 가치 평가가 일상적인 사회 시스템으로 고착화된 일본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초고령 사회에 일어날 법한 디스토피아적 세계 하나를 섬뜩하게 제시한다. 그것은 국가가 친절하게 노인의 안락사를 권유하는 사회다. 초고령 사회가 곧 심각한 사회적 재난으로 인식되는 시대,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 최초로 75세 이상 국민에게 안락사를 권장하는 정책 ‘플랜 75’를 시행한다.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관객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노인 혐오 범죄가 발생한 현장, 장총을 든 청년은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의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 노인들도 더는 사회에 폐 끼치기 싫을 것이다. 옛날부터 우리 일본인은 국가를 위해 죽는 걸 긍지로 여겨 왔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이 오프닝 시퀀스가 2016년 일본 요양 시설에서 일어난 고령자 살인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 ‘플랜 75’가 국회를 통과했다는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온다. “일본의 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묘수가 될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영화에는 ‘플랜 75’와 관련된 네 인물의 사정이 등장한다. 먼저 미치(바이쇼 치에코)의 이야기. 미치는 호텔에서 청소 일을 하며 성실하게 삶을 꾸려가는 78세 여성이다. 가족은 따로 없다. 제 삶을 스스로 책임지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호텔의 동년배 동료가 업무 중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갑작스레 명예롭지 않은 퇴직을 하게 된다. 그녀에겐 경험과 성실함이라는 무기가 있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일도 새로운 집을 구하는 일도 녹록지 않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을 때, 노인들은 자신들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세상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다.
미치도 마찬가지다. 세상으로부터 서서히 밀려난 미치는 열심히 국가가 홍보 중인 ‘플랜 75’의 신청서를 받아들게 되고, 인간다운 삶과 죽음을 보장하지 않는 세상과의 이별을 담담히 준비한다.

노인의 안락사를 권유하는 섬뜩한 사회 <플랜 75>
노인의 안락사를 권유하는 섬뜩한 사회 <플랜 75>

미치와 직간접적으로 엮이는 3명의 청년 세대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성실한 직장인의 태도로 노인들에게 ‘플랜 75’의 절차와 ‘혜택’을 설명하는 담당 직원 히로무(이소무라 하야토). 그는 순진한 대리자, 친절한 자살 권유자가 되어 국가의 합법적 살인을 돕는다. 그가 자신의 일에 도덕적 회의를 갖게 되는 건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삼촌이 ‘플랜 75’를 신청하게 되면서다.
삼촌의 일을 처리하던 그는 자신의 일이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잔인한 시스템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고국에 있는 아픈 딸의 심장 수술비를 벌어야 하는 필리핀 출신 이주노동자 마리아는 고액의 급료를 받을 수 있는 정부의 일이라는 제안에 ‘플랜 75’ 이용자의 유품 처리 업무를 맡는다. 그곳에서 마리아는 애도 없는 죽음, ‘효율적 폐기’에 초점을 맞춘 시스템을 경험한다. 마지막으로 ‘플랜 75’ 콜센터에서 일하는 요코. 미치의 마지막 말동무가 되어주는 요코는 수화기 너머로 미치의 따스한 마음을 느낀다. 미치 역시 요코와 통화할 때면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 수다스러워지고 활기찬 모습을 보인다. ‘신청자가 (안락사에 대한) 마음을 바꾸지 않도록 잘 유도해야 한다’고 교육하는 상사의 말을 들으며, 교묘하게 악질적인 시스템의 본질을 확인한다.

영화에 굳이 3명의 청년 세대가 등장하는 이유는 영화 속 가상의 정책 ‘플랜 75’가 노년 세대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영화에서 일본 정부는 ‘플랜 75’의 경제적 파급 효과가 1조에 달한다고 홍보한다. 본질은 이거다. 평화롭게 죽을 권리를 제공할 테니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해달라는 친절한 권유가 아니라 ‘경제적 파급 효과’를 위해 희생해달라는 협박. 그 협박의 화살은 언젠가는 노인이 될 청년 세대에게도 향할 것이다.

인간을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사회적 비용으로 생각하는 사회에 어떤 희망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회는 통합될 수 있고, 어떻게 사회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사회적 약자를 희생시켜 유지되는 시스템에서 어쩌다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과연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 살아남은 젊은 세대는 과연 불안과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영화 <플랜 75>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사회에 희망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권」

노인의 안락사를 권유하는 섬뜩한 사회 <플랜 75>

글_ 이주현ㅣ전 씨네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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