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 이야기
[2026.7~8]
돌봄에서 권리로
노인 인권 보장을 향한 국제적 노력

2025년 봄, 제58차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역사적인 결정이 내려졌다. 전 세계 국가들이 만장일치로 노인 인권을 보호하는 국제 협약 초안을 논의할 것을 공식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이 장면은 단순한 외교적 합의를 넘어, 수십 년에 걸친 오랜 논의의 결실을 의미한다.
놀랍게도, 지금껏 노인만을 보호하는 국제인권조약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을 위한 조약(여성차별철폐협약, CEDAW), 아동을 위한 조약(아동권리협약, CRC), 장애인을 위한 조약(장애인권리협약, CRPD) 등은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졌으나, 전 세계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노인을 위한 전문 조약만은 빠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기존의 인권 조약들이 노인을 아예 무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인이 겪는 차별, 돌봄 과정에서의 학대, 의료 접근권 침해, 사회로부터의 배제 같은 문제들은 기존 조약의 틀 안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국제 인권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규범적 공백(normative gap)'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공백으로 노인들은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다. 2006년 장애인권리협약(CRPD)이 채택되자 노인들이 겪는 규범적 공백이 더 가시화되었다. 많은 노인들이 노화로 인해 장애 유사 상황에 처하고 있음에도, 장애인을 위한 전문 조약은 있는 반면 노인을 위한 전문 조약은 없었다.
국제 사회가 노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세계고령화총회에서 각국은 노인을 위한 국제 행동 계획을 채택했다. 이어 1991년에는 유엔 총회가 '유엔 노인 원칙'을 결의로 채택했다. 이 원칙은 독립, 참여, 돌봄, 자아실현, 존엄이라는 다섯 가지 가치를 노인의 삶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노인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며, 품위 있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원칙'일 뿐, 나라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가 아니었다.
2002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2차 세계고령화총회에서는 더욱 구체적인 행동 계획(Madrid International Plan of Action on Ageing, MIPAA)이 채택되었다. 이 문서에는 노인을 단순한 사회적 부담이 아니라 사회 발전의 주체로 보는 시각이 담겼다. 하지만 역시 법적 구속력은 없었다. 다양한 선언과 원칙, 행동 계획이 쌓여갔지만, 나라들이 실제로 지켜야 할 법적 의무는 여전히 없었다.

지난 40여년간 국제사회는 노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여러 원칙을 마련했지만,
이를 국가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국제조약이 없어 노인의 권리 보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오늘의 인권 지구인 이야기 이 답답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2010년, 유엔 총회는 특별 실무그룹을 만들기로 했다.
2010년 설립된 '고령화에 관한 개방형 실무그룹(OEWGA)'은 이후 14년 동안 뉴욕에서 14차례의 회의를 거치며 노인 인권 조약에 담겨야 할 내용들을 하나하나 검토했다. 노인 차별 금지, 자율적인 삶을 살 권리, 적절한 의료와 돌봄을 받을 권리, 일자리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폭력과 학대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등 광범위한 의제들이 논의되었다. 14년이라는 시간이 말해주듯,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나라마다 노인을 바라보는 시각, 재정 능력, 기존 복지 제도가 달랐고, 새로운 조약을 만드는 것이 과연 필요한지에 대한 입장도 엇갈렸다. 그럼에도 토론은 멈추지 않았다.
2024년 5월, 마침내 제14차 회의에서 실무그룹은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노인 인권 보호에 분명한 공백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를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은 법적 구속력 있는 국제 조약을 만드는 것이라는 합의였다.

노인은 취약한 존재가 아니라 권리를 가진 주체다
2025년 4월 3일, 유엔 인권이사회 제58차 회기에서 결의 58/13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결의의 핵심은 노인 인권을 보호하는 법적 구속력 있는 국제 협약을 만들기 위한 정부 간 실무그룹(Inter-governmental Working Group, IGWG)을 공식 출범시키는 것이었다. 만장일치로 모든 나라가 동의했다는 것은, 노인 인권이 이제 더 이상 일부 나라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국제 사회 전체 공통의 문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이 결의는 단순히 회의 개최를 승인한 것이 아니라, 노인을 바라보는 국제 사회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노인을 '돌봄이 필요한 취약 계층'으로만 보는 복지 중심의 관점에서, 스스로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의 주체'로 재정립하는 것. 이것이 이 결의가 담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다.
결의가 채택된 이후, 국제 사회의 움직임은 빠르게 이어졌다. 2026년 2월 제네바에서 첫 번째 조직 회의가 열렸다. 브라질, 슬로베니아, 필리핀, 감비아, 아르헨티나 등 5개국이 핵심 그룹을 구성해 논의를 이끌었고, 전 세계 100여 개 노인 단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조직 회의 이후, 각국 정부와 국가인권기구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는 조약의 구조와 원칙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국가인권위원회는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Global Alliance of 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s, GANRHI)의 고령화 실무그룹 의장으로서 28개 국가인권기구의 의견을 모아 공동 제출하기도 했다.
2026년 7월과 10월에는 협약의 실질적 내용을 논의하는 본 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릴 예정이다. 각국 정부와 국가인권기구, 시민사회 단체들, 그리고 노인 당사자들이 테이블에 앉아 조약의 글자 하나하나를 다듬게 된다.
법적 구속력 있는 국제 협약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 간단히 말하면, 조약을 비준한 나라들은 노인의 권리를 보호할 법적 의무를 지게 된다. 조약의 이행여부를 감시하는 위원회가 생기고, 당사국들은 주기적으로 이행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장애인권리협약이 만들어진 이후, 많은 나라에서 장애인 관련 법률이 개선되고 국내 정책이 바뀐 것처럼, 노인권리협약도 각국의 노인 정책과 법률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
물론 협약이 완성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협약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할 것인지, 어떤 권리를 담을 것인지, 감시 체계는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두고 나라들 사이에서 치열한 협상이 이어질 것이다. 재정 문제도 걸림돌이다. 유엔의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역적 협의를 충분히 열고 모든 나라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인 당사자들의 목소리다. 결의 58/13은 협약 성안 과정에서 노인과 그 대표 조직의 참여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노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제로 어떤 권리가 침해되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아는 것은 결국 노인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통계나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존엄성과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인간으로서 노인들의 목소리가 이 과정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1982년 비엔나 행동계획에서 출발해 40년을 넘게 달려온 긴 여정이 이제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 정부 역시 이러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발맞추어, 인권 가치를 향한 오랜 노력이 실질적인 권리 보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책임감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인권」
글_ 나영재ㅣ국가인권위원회 국제인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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