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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는 시간 [2025.03~04] 완벽한 여성을 원하는 ‘나’ 그리고 사회 <서브스턴스>

 

젊은 시절 ‘팝콘 배우’라는 얘기를 들어야 했던 데미 무어는 60대에 만난 영화 <서브스턴스>(감독 코랄리 파르자)를 통해 자신의 건재함과 배우로서의 파괴력을 널리 알렸다. 지난 1월 5일 열린 제8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서브스턴스>로 여우주연상(뮤지컬, 코미디 부문)을 수상한 데미 무어는 무대에 올라 “이 상이 45년만의 첫 연기상”이라며 다음과 같은 소감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충분히 똑똑하지 않고, 충분히 예쁘지 않고, 충분히 날씬하지 않고,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있죠. 어느날 한 여성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앞으로도 결코 충분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비교의 잣대를 내려놓으면 당신의 가치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3월 2일 열리는 제9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서브스턴스>의 메시지를 정확히 담고 있는 이 수상소감의 또 다른 버전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은 2월의 끝자락이다.)

 

서브스턴스

 

“여자는 50대가 되면 끝이야”라는 영화 속 대사를 현실에서 통쾌하게 뒤엎는 중인 데미 무어의 요즘 행보는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쾌감과 영감을 안겨 주고 있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자신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더 아름답기를, 더 젊어지기를, 더 완벽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데미 무어 뿐일까. 젊음과 아름다움의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존재할까. 이건 비단 쇼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성형과 미용과 다이어트 산업의 성행이 그것을 증명한다. 젊음에 대한 추앙과 노화에 대한 거부감은 이들 산업의 주요 동력원이다.

 

서브스턴스

 

그들은 끊임없는 비교(남과의 비교는 물론이고 ‘비포’와 ‘애프터’를 통한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 더 나은 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증폭시킨다. 마치 젊음의 묘약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모든 비극은 비교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은 한때 유명한 스타였다. 아카데미상 수상 배우라는 명성이 흐릿해진지 오래인 지금은 TV 에어로빅 쇼의 진행자로 활동 중이다. 50번째 생일을 맞은 엘리자베스는 언제나처럼 ‘당신의 인생을 빛나게!(스파클 유어 라이프!)’를 외치며 방송 녹화를 마친다. 공교롭게도 그녀를 기다리는 건 반짝이는 선물이 아니라 방송 하차 통보라는 괘씸한 선물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한 엘리자베스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수상한 눈빛의 젊은 남자에게서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소개 받는다. ‘내 인생을 바꿨어요’라는 쪽지와 함께.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서브스턴스는 사람들을 이렇게 유혹한다. “더 나은 나를 꿈꿔본 적 있나요? 한번의 주사로 더 아름답고 완벽한 새로운 당신이 될 수 있습니다.” 서브스턴스의 광고에 동원되는 ‘더 나은’ ‘새로운’ ‘완벽한’이라는 긍정의 수사는 일견 무해해 보이지만 그렇기에 인간의 탐욕이 불러올 부작용을 교묘히 감추는 효과를 동반한다.

 

서브스턴스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사실이 불러오는 자신감의 하락과 불안의 고조 속에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를 주문한다. 이제부터 본격 ‘보디 호러’가 시작되는데, 약물을 투여한 엘리자베스의 등을 찢고 나온 건 젊고 건강한 ‘새로운 나’, 엘리자베스의 또다른 버전인 수(마가렛 퀄리)이다. 하나의 자아를 가진 두 개의 몸은 일주일씩 번갈아가며 생활을 시작한다. 문제는 수에게 일주일은 너무 짧고 엘리자베스에겐 길고 지루하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얼굴이 걸려 있던 대형 광고판이 수의 얼굴로 대체된 것을 씁쓸히 지켜보며 질투와 자기혐오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수는 쏟아지는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에 행복해하며 자신의 시간 지분을 연장하고 싶어 일주일의 교체 주기를 야금야금 어기기 시작한다. 그것이 또 다른 자신을 착취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문득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떠오른다. 소설의 인물은 남자지만 분열된 자아와 분신이라는 설정,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부른 파국이라는 점이 닮았다. 젊고 아름다운 시절이 박제된 자신의 초상화처럼 평생 살기를 바랐던 청년 도리언 그레이는 그 바람이 이루어졌을 때 쉽게 타락하고 만다. 오스카 와일드는 인간의 의지를 의심하며 이런 문장을 썼다. “유혹을 이겨내는 방법은 유혹에 굴복하는 것뿐이다.”

 

서브스턴스

 

그렇다면 유혹은 왜 생기는가. 누가 부추기는가. 아름다움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자기계발을 넘어 자기학대와 자기혐오는 누가 조장하는가.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중요한 건 이런 질문들이다. 50대의 엘리자베스가 방송에서 하차하고 그 자리를 20대의 수가 꿰차는 상황은 쇼 비즈니스 세계에서 여성(혹은 여성의 몸)의 가치가 어떻게 평가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은 과도하게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를 클로즈업해 보여주면서 그 시선의 불편함을 관객이 정면으로 느끼게 만든다. 그러면서 엘리자베스를 ‘왜 이 사회는 유독 여성의 몸과 나이에 제멋대로의 잣대를 들이대느냐’고 강력히 항변하는 전사형 인물로 그리는 게 아니라 젊어지고 싶고 아름다워지고 싶어 유혹에 굴복하는 보통의 인물로 그린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엘리자베스가 치열하게 상대하는 건 수, 즉 자기 자신이다. 나이든 나와 젊은 나의 대결. 하지만 둘은 하나다. 서로를 끌어안지 못하던 두 사람이 결국 한 몸이 되어 ‘몬스트로 엘리자수’로 변하는 결말은 상징적이다. 눈코입이 질서 없이 엉겨 붙은 몰골의 ‘몬스트로 엘리자수’를 본 사람들은 눈앞의 ‘괴물’을 공격한다. ‘나와 나’의 대결은 ‘괴물이 된 나와 괴물을 만든 사회’의 대결로 치환된다.

 

서브스턴스

 

<서브스턴스>는 더 아름다워지고 싶고 더 젊어지고 싶었던 한 여인이 파괴적 자기혐오와 잔인한 자기착취의 굴레에 갇히는 이야기다. 생살을 찢는 아픔과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관객이 통각하게 만들며 스크린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영화지만, 핏빛이 걷히고 난 뒤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하게 되는 생각은 결국 사랑이다. 자신을 사랑하기란 왜 이토록 어려운가. 더 나은 삶이란 대체 무엇인가. 확실한 한 가지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일이야말로 비극이란 것이다.

 

 

글 | 이주현(전 씨네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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