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 이야기 [2024.11~12] 세계 속 국가인권기구, 국경을 넘는 인권
국가인권기구는 참으로 독특한 기관이다. 정부 부처 중 하나이지만, 주된 역할은 국가의 인권침해 여부를 감시하고 권고한다. 언뜻 보면 시민사회단체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더 많은 자원과 정보접근권을 갖고 인권침해를 조사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역할을 잘하면 다른 정부 부처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하고, 또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면 시민사회단체들로부터 쓴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인권기구가 제대로 활동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독립성’이다.
GANHRI 총회
국가인권기구의 국제적 시작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엔 설립 이후 인권은 국제사회의 중요한 의제였으나, 대부분 국가들은 이를 충분히 존중하고 보호하는데 소홀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국에 인권보호 의무를 맡기고 감시하는 독립적인 기구로서 국가인권기구 설립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91년 파리에서 국가인권기구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첫 논의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에 관한 원칙(파리원칙)이 탄생했다. 이 원칙은 1993년 유엔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되었으며, 지금까지 국가인권기구 활동을 평가하는 국제적 기준이 되어왔다. 1993년 당시에는 캐나다, 호주, 인도 등 10여 개에 불과했던 국가인권기구들은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120여 개로 늘어났다.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다른 나라에서 국가인권기구는 그 형태에 따라 옴부즈맨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 세계 국가인권기구들은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Global Alliance of 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s, GANHRI)라는 연대체를 구성하여 공동으로 여러 가지 의제들을 해결해 나가기도 하고, 아시아태평양, 미주, 아프리카, 유럽 등 지역별 네트워크를 구성해 더 긴밀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 인권위는 2002년 아시아태평양 국가인권기구포럼(Asia Pacific Forum of 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s, APF)에 가입한 이래, 아·태 지역 및 국제사회의 인권 보장과 증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현재 APF는 26개 국가인권기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무국은 호주에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다른 소지역과는 달리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인권 메커니즘이 부재하기 때문에 국가인권기구들 사이의 네트워크와 협력이 특히 중요하다. (미주에는 미주인권재판소, 유럽에는 유럽인권재판소,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 인권재판소가 있다). 특히 기후변화나 난민 문제와 같이 국경을 넘는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국가인권기구 간의 협력과 연대가 필수적이다. APF는 국가인권기구가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법률 자문과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특정 국가의 인권 상황에 대해 지역 차원의 대응을 하기도 한다. 최근 발생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무력 분쟁에 대해서는 회원기구인 팔레스타인 인권위에 연대 서한을 보내며 무분별한 민간인 학살을 당장 중단할 것을 양측에 촉구하기도 했다. 또한 키르기즈 공화국 의회가 옴부즈만을 부당하게 해임하려고 했을 때는 의장 서한을 통해 우려를 표명했다. 당시 한국 인권위는 APF 의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국내 인권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의 인권 상황에도 관심을 갖고 국제적 연대를 이루는 것이 중요함을 재확인한 순간이었다. 또한 한국 인권위는 APF 내에서 ‘분쟁 시 국가인권기구의 역할’ 가이드라인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미얀마, 팔레스타인 등에서 계속되고 있는 분쟁 상황에 있어 각국 인권위가 분쟁 전, 중간, 후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해당 가이드라인 초안을 인권위가 APF 회원기구에 제시했을 때 많은 회원기구가 호응하며 적극적으로 성안위원회에 참여했다. 논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분쟁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각 국가인권기구의 실제 사례는 무엇인지, 정전 상태인 한반도에서 한국 인권위의 역할은 무엇인지, 평화와 인권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이 필요하다. 성안위원회는 앞으로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유엔개발계획(UNDP) 등 국제 파트너들과 협력하여 이 가이드라인을 발전시켜 나갈 예정이다. 완성된 가이드라인은 분쟁 시 발생하는 인권침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국가인권기구 활동의 정당성과 방향성을 제시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각국의 국가인권기구들은 위기 속에서 서로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힘을 모아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간다. 인권은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국가인권기구 간의 협력은 더 나은 인권 환경을 조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가 다른 국가인권기구의 위기에 내민 손은, 언젠가 우리에게 필요한 지원과 연대로 되돌아올 것이다. 이러한 협력과 연대는 결국 인권의 진전을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앞으로도 한국 인권위가 국내를 넘어 국제 인권 문제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그 과정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글 | 백가윤(국가인권위원회 국제인권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