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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보기 [2024.11~12] #3 차별로 얻은 한국인만의 행복한 저녁은 가능한가?

 

한국사회는 오래 전부터 이주민을 사람이 아닌, 한국사회 특정 문제의 해결 수단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이런 문제제기가 있을 때마다 정부는 ‘동등한 인간으로서 권리를 보장한다.’,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 ‘어떤 차별도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설사 사실이 아닐지언정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이라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최소한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려 꾸미지도 않으려 한다.

 

아리셀 화재참사 시민 추모제 장소:세종문화회관 2024. 8. 8.
아리셀 화재참사 시민 추모제 장소:세종문화회관 2024. 8. 8.

 

이제는 이주노동자에게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줄 ‘궁리’를 공식적으로 밝힌다. 대통령과 서울시장, 국회의원 할 것 없이, 이주노동자의 임금이 너무 높다며 성화다. 이런 차별이 국제법과 국내법으로 모두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어서 이 차별을 가능케 할 방법을 찾아내라고 관계자들을 닦달한다. 또한 한국사회는 이주민을 위험한 현장에 몰아넣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과 미안함을 표현하는 일도 이제 더 이상 안 하려 한다. 유가족은 아직도 농성장을 전전하는데, 그 흔한 립서비스나 재발 방지 노력도 더 이상 없다. 국정감사가 한참인데, 아리셀 대표 박순관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조차 하지 않고 있다가, 시민사회의 성화에 마지못해 불렀다. 마치 모두의 기억에서 잊히기를, 그리고 없었던 일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이주민에 대한 일련의 처우는 한국 정부와 사회가 이주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끔찍한 거울이다. 아니,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솔직하고 추한 민낯이다. 2024년 8월 시범사업으로 100명의 필리핀 가사노동자가 한국에 왔다. 그러나 사업 시작 두 달 만에 두 명이 숙소에 돌아오지 않았다. 부랴부랴 마련한 간담회에서 가사노동자는 그동안 숙소 밖으로는 밤 10시 이후로 나갈 수 없었으며, 심지어 임금이 제대로 지급되지도 않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가사노동자 제도는 시작 전부터 전문가 대부분이 반대해 왔다. 하지만 저출생 대책과 한국 여성의 사회진출을 위해서 필요하다며 억지로 꿰맞춘 제도다. 그래서 그 어떤 사업보다 관계 당국의 집중적인 관리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화성 아리셀 화재참사 희생자 추모행동

 

애초에 가사노동자가 받아야 할 최소한의 임금을 감안하면, 실제 이들을 고용할 여력이 있는 가정이 많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출생의 직접적 원인은 아이 돌봄이나 가사 부담이 아니다. 한국 여성의 사회진출을 위한 대책으로써 가사노동자를 상정하는 것은 애초에 적합한 대책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정부의 논리는 하나였다. 이 모든 게 한국인을 위한 것이며 한국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위험한 현장을 그대로 방치하고 어떤 개선도 없이 그 현장에 이주민을 그대로 몰아넣는, ‘위험의 이주화’는 어떠한가. 이주민의 산업재해 사망률은 한국인과 비교하면 무려 7배에 달하고 있다. 한 집단의 사망률이 다른 집단에 비해서 7배 높다는 점을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2024년 6월 24일 발생한 아리셀 화재 참사로 이주노동자의 취약성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사망자 23명 중 이주민이 18명에 달한다. 화재의 순간 당연히 누구도 다른 이를 죽음으로 떠밀지 않았다. 그러나 애초에 불법하도급 업체를 통해 파견된 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안전교육이 제공되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들은 비상구 위치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비상구는 정규직만이 지문과 카드로 열 수 있는 문을 통과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처음부터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들은 정규직의 도움 없이는 비상구로 나갈 수조차 없었다.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고소고발 기자회견 2024. 7. 10.  장소: 화성시청 합동분향소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고소고발 기자회견 2024. 7. 10.  장소: 화성시청 합동분향소

 

두 사건은 한국사회가 이주민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우하는지를 살펴본다는 측면에서 같은 맥락을 가진다. 한국사회는 오래 전부터 자신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근본적 원인을 찾는 대신, 이주민을 손쉬운 대안으로 여겨 왔다. 가사 노동자가 오기 오래 전부터, 서울시 몇몇 구청의 국제결혼가정을 담당하는 부서의 명칭은 ‘출산다문화팀’이었다. 한국사회가 이주여성을 출산의 도구, 저출생의 대책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아리셀 화재 참사 훨씬 전부터 이주민의 산업재해 비율은 매년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었다.

 

작업 현장을 안전하게 만드는 대신, 이주민을 위험한 현장으로 몰아넣는 이 모든 부도덕과 비양심은 이주민이 한국에 온 이후로 멈춘 적이 없었다. 너무나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누구나 원치 않는 힘들고 위험한 현장의 손쉬운 대안으로, 전 세계 최저 출생률을 만회하기 위한 대안으로, 이주민을 소비할 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 소비에 최소한의 국제규범과 인권이라는 마지막 한계마저 귀찮은 듯 노골적으로 벗어던지고 있다.

 

이주민이 한국사회에 온 지 이제 30여 년이 넘어간다. 시간이 지나 달라진 것은, 이주민에 대한 차등 임금 시도나 위험에 노출시키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가지거나 속내를 숨길 필요가 없다는 정부의 태도뿐이다. 그 어디에도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도 없다.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은 차등 대우를 허용하게 만들고, 차등 대우는 곧 일상적인 차별로 이어진다. 그리고 결국 이주민에 대한 차별은 정부가 공인한, 정당한 그 무엇이 되었다. 정부는 차별의 공식화가 기존 한국인의 이익과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분리하고 착취한 대가로 얻은 이익이 그 사회 구성원의 행복에 기여하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구별짓기, 우열 가르기를 통해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모두를 불행에 몰아넣는
화력 좋은 장작으로 쓰일 뿐이다.

 

이주 가사돌봄노동자 권리 보장을 위한 연대회의 출범 기자회견. 장소: 서울시청 앞  2024. 9. 26.
이주 가사돌봄노동자 권리 보장을 위한 연대회의 출범 기자회견. 장소: 서울시청 앞  2024. 9. 26.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력과 더불어 문화적 위상이 나날이 높아지는 한국사회의 행복도가 어째서 매년 떨어지고 있는가를 보라. 이것이 누군가를 차별해서 얻은 이익이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 탓인가? ‘해외 우수인력 유치’, ‘글로벌 문화 선도 국가’란 민망한 구호를 외치기 이전에, 현재 이곳에 사는 이주민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모두가 일상의 고단함을 녹일 행복하고 안락한 저녁을 꿈꾼다. 그러나 누군가의 눈물과 고통의 대가로 얻은 저녁에서 나만의 행복과 안락함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행복하고 평안한 저녁은 모든 이에 대한 인권 보장과 동등한 대우로 가능하지 않겠는가.

 

 

글쓴이 이완 이주인권과 문화다양성 활동가로 아시아인권문화연대에서 줄곳 함께해왔다. ‘다양성이 빛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를 썼다.

 

글 | 이완(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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