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기 [2024.07~08] #2 노년기, 자기결정권과 의사결정 지원
지혜를 가진 장로로서 존중받던 과거의 노인과 달리 현대를 살아가는 노인은 빠르게 진행되는 사회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 하는 ‘부적응 집단’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자신이 자랐고, 일했던 시절의 문화, 가치관, 제도와 현저히 다른 환경에 있으면 누구라도 위축되어 정신적 스트레스가 가중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노인에 대한 부정적 사회적 인식, 즉 연령차별주의(ageism)가 확산되면 노인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
치매노인의 급증, 노인성 정신질환의 증가, 섬망을 비롯한 노인의 행동 및 심리·정신적 증상의 확산은 고령사회의 자연적 산물이라기보다는 노인세대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사회환경과 관련이 깊다. 우리 사회는 치매나 정신질환에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편견도 심하다. 따라서 이들을 돌보는 가족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치매노인이나 정신질환 노인을 사회로부터 격리하여 요양원 등에 입소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도 연령차별주의의 영향일 수 있다. 요양시설 입소계약을 아무런 법적 권한 없는 가족이 체결하고 치매노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거나, 형식적으로 치매노인의 서명을 받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관행의 확산이 그 증거이기도 하다. 노인의 자기결정권과 의사결정지원을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논의 테이블에 올려야 할 필요성이 여기 있다. 사람의 감성과 이성의 상호작용은 고대로부터 많은 철학자들의 관심사였지만, 지적으로 떨어진 사람이나 광기 있는 사람들의 감성과 이성의 상호작용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무가치한 존재로 사회에서 배제되어 왔다. 오랜 엣날 로마법 시대부터 지적능력이 떨어지거나 광기 있는 사람에게는 후견인을 붙여 사회생활에서 배제해 왔던 것이다.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또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이성적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를 모델로 한 근대사회의 제도 역시 당시의 자산가였던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한 결과물이다.
왕족, 귀족 등의 출신 배경이 아니라 ‘이성’이 인간을 가치 있게 만든다는 믿음을 확산시킴으로써 부르주아지의 사회권력 장악을 정당화한 것이었다. 그 당시 아동, 여성, 정신질환자, 발달장애인 등을 이성적이지 않다고 보고 ‘보호’라는 명분 하에 이들의 자기결정권을 박탈하고 부모, 남편, 후견인 등이 대신하여 의사결정을 하도록 하였다. 이런 사회제도 하에서는 IQ로 표현되는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또 확산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개인 또는 집단을 대상으로 하든 국가를 대상으로 하든 ‘보호’는 필연적으로 ‘차별’과 ‘불평등’을 낳기 마련이다. 일제가 조선강점을 정당화한 것도 ‘보호’였고 그 결과 조선인들이 얼마나 심한 차별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보호주의’ 이데올로기는 사회변화에 대응하는 지적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일수록 더 강화되고, 치매나 정신질환 있는 노인을 차별적으로 취급하게 된다.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 찍힌 노인집단도 차별과 불평등에 노출시키게 된다.
인간의 의사결정을 두 마리 말이 이끄는 수레에 비유한 플라톤처럼 프로이드는 코끼리 같은 감성과 조랑말 같은 이성이 끄는 수레로 표현하였다. 인간의 의사결정이 이성적이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다. 우리의 경험을 담고 있는 시쳇말에는 이를 잘 드러내는 표현들이 많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꿈치가 달걀 같다고 나무란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 듣지 않는다’ 등등 많은 말들에서 의사결정이 감성적임을 보여준다. 선거 때 잘 드러나는 지역몰표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간의 의사결정은 그가 속한 사회관계망에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감성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이성’을 중시하는 사회제도의 전제와 달리
인간의 의사결정은 상호의존적이고 감성적이며,
그 때문에 개인적 또는 집단적 무의식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사결정과정을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감성을 침해하는 외부요인은 개인에게 큰 정신적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자기결정권한을 뺏긴 상태에서 타인의 의사결정이 자기 삶을 결정할 때가 그렇다. 자기결정이 아니라 가족의 결정으로 요양시설에 입소한 노인이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는 것도 이런 요인과 무관하지 않다. 지적 능력이 높든 떨어지든, 정신질환이 있든 없든 자기결정권을 존중받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그것이 존엄한 한 인간으로서의 삶에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삶에 본질적인 자기결정권은 자신에게 속한 것, 특히 자기 생명, 신체, 감성과 정신, 재산에 대한 관리권을 본인에게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매 노인이나 발달장애인이 자기 통장관리를 자녀나 후견인이 맡는 순간 흔히 집착이 강해지기도 하는데, 바로 자신의 영역이 침해되었음을 감성이 직감하기 때문이다.
아동권리협약 제12조, 장애인권리협약
제12조가 아동과 장애인의 자기결정권 존중을
강조하는 것은 이처럼 인류의 경험이자
과학적으로 뒷받침된 인간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후견인에 의한 대행의사결정이 의사결정지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의 의사결정이 사회관계망 내에서 상호의존적이고 감성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면 이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면 어떤 결정을 하든지 방치해 두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은 의사결정이 ‘독립적’이고 ‘이성적’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의사결정이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은 인간이 상호연대하여 살아가는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사결정지원은 상호연대라는 우리의 존재방식을 구현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의사결정지원이 필요한 것은 현대사회가 고도로 분업화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치매, 정신질환, 발달장애 등이 있는 사람의 의사결정을 보자. 여기서 의료, 요양서비스,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그리고 행정인력은 당사자를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가족조차 이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이들의 의사결정을 이해하거나 해석해서 서비스제공자, 행정인력, 때로는 가족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사결정지원이다. 의사결정지원이 있으면 치매나 정신질환, 발달장애가 있는 노인도 자기 삶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의사결정지원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들의 권리를 이해하고, 비언어적으로도 전달되는 의사와 선호도를 해석하는 역량이 필요하다. 때로는 전문성 있는 인력이 이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 수술, 주거의 결정, 재산의 처분 등 본인에게 중요한 의사결정일 때가 그렇다. 물론 의사결정지원에는 한계영역이 있다. 현재 상당한 정도의 자해나 타해의 현저한 위험이 예상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결정을 지원하기보다 본인 보호가 더 중요하다. 생명, 신체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노인을 위한 의사결정지원은 ‘나와 동등한 가치 있는 인간’으로서의 노후의 삶을 보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사람 중심으로 나아가는 사회문화 조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출산을 포함한 우리 사회가 직면한 많은 문제들이 사람 중심이 아니라 금전중심의 획일화된 사회문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고려한다면, 노인의 의사결정지원은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의제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글쓴이 제철웅은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정신장애인 전국권익옹호기관 단장과 사단법인 후견·신탁연구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최근 출간한 저서로는 ‘위험사회와 의사결정능력 장애인의 자기결정권 행사와 기원(공저)’과 ‘노년기, 자기결정권(공저)’ 등이 있다.
글 | 제철웅(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