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인을 만나다 [2024.05~06] 진정을 통해 신념을 지키다
진정인 양민진 씨
“진정인을 만나다” 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여 권리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청각·언어 장애인에 대한 편견에 맞서 관행을 바꾸기 위해 용기 낸 양민진 씨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던 양민진 씨는 한류 열풍을 보며 자신도 휠체어를 타고 세계를 여행하면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그날을 위해 2년간 한국어문화학과를 복수전공하며 졸업을 준비했지만, 마지막으로 한국어교육 모의수업만을 남겨두었을 때 우려하던 문제가 발생했다. 그녀는 청각·언어·지체 장애가 있는 복합 장애인이다. 음성 언어로 소통하는 비장애인과 달리 필담과 SNS 메신저를 소통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모의수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보완·대체의사소통 도구나 보조인력 활용이 필요하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은 양민진 씨가 직접 자신의 음성으로 수업을 진행할 수 없다면 필담 방식의 모의수업은 인정하기 어렵다며, 대안으로 30시간의 참관수업을 제시하였다.
양민진 씨도 처음부터 실습을 고수할 계획은 아니었다. 국립국어원의 답변처럼 모의수업이 불가능하다면 참관수업을 들으며 더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어문화학과 교수님의 의견은 달랐다. 수업을 계획하고, 시연하고, 피드백 받는 과정을 통해 이론이나 참관수업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배우게 되는데, 대체 의사소통수단을 사용한 수업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과적으로 학생의 배울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교수님의 지지가 양민진 씨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러던 중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하던 지인을 통해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활동가와 연락이 닿으면서,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게 되었다.
변화는 쉽지 않았다. 국립국어원 측은 ‘한국어 교원이 필담으로만 수업한다면 한국어 학습자는 듣기, 말하기 교육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보조 교원이나 음성 자료를 통해 교육하더라도 교원이 발음이나 듣기 수업을 주도적으로 지도하기 어렵다면 한국어 학습자의 학습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반대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대체의사소통수단이 개발되었고, 스마트폰 앱을 사용한 제2외국어 학습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대임에도 대학에서의 모의수업 진행을 위한 편의제공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인권위는 한국어교원 자격증을 위한 ‘자격’은 한국어교육의 구성과 체계, 구성방식, 수업내용 등에 대한 지식과 기술, 소양 정도를 말하는 것이므로 ‘구어’가 아닌 ’다른 의사소통수단‘을 통해 모의수업을 진행하더라도 이러한 자격을 평가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문제가 된 모의수업 역시 수업과정의 하나이므로, 장애학생에게 장애의 특성과 유형을 고려한 필담, 보완ㆍ대체의사소통 도구, 보조인력 등의 편의를 제공하지 않고 ‘구어’로만 수업하도록 한 것은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을 위반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녀는 인권위가 국립국어원장에게, ‘한국어교원 자격을 취득하고자 하는 장애인이 대학에서 한국어교육 모의수업을 하는 경우 장애의 유형과 특성에 맞는 편의가 제공될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을 권고한 결정문을 받을 수 있었다. “제 의견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국가에서 인정했다는 게 기쁘고, 감동이었어요.” 국립국어원이 인권위 권고를 수용함에 따라 양민진 씨는 대체의사소통수단을 활용해서 사전에 만든 수업 대본을 음성으로 변환하여 모의수업을 진행했다. 긴 노력 끝에 한국어문화학과 과정을 마치고 한국어교원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힘들었던 시간만큼 뿌듯했어요. 덕분에 앞으로 더 힘든 시간이 와도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인권위 조사를 통한 권리구제 과정은 피해자가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고 그 권리를 구체화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양민진 씨에게 이번 사건 이후 차별 문제를 대하는 마음가짐에 변화가 있는지 물었다. “어려운 사람들의 권리를 조금 더 생각하게 됐어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오랜 시간 이어오고 있는 이동권 시위와 관련해서도 국가가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서 더 노력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인 이들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고 했다. 적은 금액이나마 ‘함께’가 필요한 곳에 후원하고, 연대하기 위해 노력한다며 수줍게 웃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자신의 의지와 신념에 따른 용기가 사회에 선한 영향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정말 행복한 일로 보였다.
인터뷰는 필담과 SNS 메신저를 통해서 진행됐다.
인터뷰는 필담과 SNS 메신저 앱을 통해서, 또 서로를 마주 보며 전하는 표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소통방식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앞으로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더 다양한 소통방식이 개발된다면 그녀의 장애가 더 이상 장애가 아니게 되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그전까지는 많은 이들이 사람 사이의 다양한 소통방식에 대해 한 번쯤 열린 마음으로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참고로 이 인터뷰가 장애를 ‘극복’한 누군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하려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다. 대학 졸업 후 다양한 진로를 탐색 중이라는 그녀에게 앞으로 개인적으로 바라는 꿈이나 목표가 있을지 물었다. “장애가 계속 제 옆에 있어도 받아들이고,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면서 당당히 잘 살아가고 싶습니다.” 부드럽고 씩씩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녀의 도전을 응원한다. 그녀의 바람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많은 도움을 주는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세계 곳곳에 봄날의 햇살 같은 양민진 씨의 미소를 당당히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글 | 박정현(국가인권위원회 홍보협력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