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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브릿지 [2024.01~02]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의 정거장, 스테이션 사람

 

인권중심사람

 

2014년 당시 성소수자 단체에서 일하던 나에게 인권재단 사람이 건립한 공간 “인권중심 사람"은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공공시설에서 “성소수자”라는 이름이 붙은 행사는 줄줄이 이용을 거부당하던 때였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눈치 보지 않고 찾아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터였다. 어느새 소문을 들은 동성애혐오자들이 난입하려 했던 날, 동료 활동가 수십 명이 함께 건물 앞을 둘러싸고 공간을 지켜냈던 장면은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인권중심사람

 

2,914명의 기부 참여로 건립된 인권중심 사람에서는 8년 동안 2천 건이 넘는 인권 행사가 열렸다. 내가 재단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2018년 예멘에서 건너온 난민들에 대한 혐오 정서가 확산되고 있을 때, 한 난민 당사자가 이곳을 찾아와 직접 시민들을 만난 것이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오해와 편견이 사그라들기에 충분했다.

 

이 밖에도 사회적 소수자를 환대하자는 원칙은 공간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는데, 어디든 휠체어 이용자가 접근할 수 있었고, 성별 구분 없는 1인 화장실은 성소수자 친화적인 편의시설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자랑할 만한 기록을 뒤로 하고, 2021년 인권중심 사람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있다. 인권활동이 시민들과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바람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점차 위축되고 있음을 체감한다. 인권운동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혐오세력은 더욱 조직화되어 어렵게 쌓아 올린 인권규범마저 흔들고 있다. 작은 인권단체가 대항하기 어려운 정치적 상황들이 무력감만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런 조건 속에서 우리가 만드는 공간은 이전과 같은 가치를 지켜내면서도, 인권활동가와 조직의 성장을 보다 적극적으로 견인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가 되어야 한다.

 

 

인권활동가 성장의 베이스캠프

 

인권중심사람 (2014)
인권중심사람 (2014)

 

나는 15년 전 상근자 한두 명인 작은 단체에서 첫 인권활동을 시작했다. 수년 동안 다양한 성소수자들과 가족들을 상담하며 이들이 스스로 자긍심을 찾아가는 과정을 도울 수 있어 참 뿌듯했다. 그런데 학교나 일터에서 차별받고 소외되는 이들의 사연, 활동가 한 사람으로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들을 마주할 때면 나의 전문성과 역량 부족을 탓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몸과 마음이 소진된 채로 일을 그만두고 나서야, 단지 책임감이나 사명감이 활동가를 성장시켜 주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권재단 사람은 지금의 인권활동가들이 당시의 나보다 나은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한다. 2024년부터는 “인권활동가의 러닝메이트”라는 새로운 사명으로, 인권활동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활동가에게 필요한 교육을 제공한다.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활동가들을 더 많이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일에 매진하려 한다. 이것이 변화하는 조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인권의 가치를 확산하는 필수적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인권활동가를 지원하는 일은 단지 우리 재단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재단에는 국가인권위원회 임직원이 참여하여 활동가 재충전을 지원하는 ‘십시일반' 기금을 운영하고 있다. 사회 구성원이 함께 나눠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

 

사진 : 건축 중인 스테이션 사람 (2023)
사진 : 건축 중인 스테이션 사람 (2023)

 

2013년의 인권중심 사람은 2024년 봄, 스테이션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확장 개관을 앞두고 있다. 스테이션 사람은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의 정거장 같은 곳이다. 인권활동가를 비롯해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들러 서로 배우며 교류하고, 따뜻한 응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커뮤니티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이 공간이 건립되기까지 인권활동가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공간이 무엇인지 조사하며 밑그림을 그렸다. 새 공간에서는 규모가 작은 조직을 위한 사무공간이 들어서고, 조직의 시작부터 성장까지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된다. 다목적 행사 공간인 ‘사람홀’에는 온/오프라인 동시 진행과 수어/문자통역에 최적화된 환경을 구축했다. 지하부터 옥상까지 접근성 확보를 위한 시설도 이전보다 더 확충하고 있다. 소통의 장벽을 없애는 다양한 시도가 앞으로 이곳에서 더 많이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인권중심사람

 

다만 예산과 인적 규모의 한계로 한동안은 빈틈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를 계속 도전하게 만드는 힘은 이 공간을 구축하는 데 힘을 모아준 4,500여 명 기부자들이다. 후원의 밤에서 만난 이들은 이 공간에 “텃밭", “터전", 그리고 “내일" 이라는 기대 섞인 이름을 붙여주었다. 따뜻한 봄처럼 찾아올 스테이션 사람에서 세상을 바꾸어나갈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글 | 송정윤(인권재단 사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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