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톺아보기 [2023.09~10] “힘을 낼 시간” 남궁선 감독을 만나다
〈십개월의 미래〉에서 현실적이면서도 위트 넘치는 연출로 성공적인 장편 데뷔를 마친 남궁선 감독이 새로운 장편 제작 소식을 알렸다. 2022년 인권위와의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한 이번 작품에서 남궁선 감독은 어떤 세상을 담아냈을까. 그의 시선을 함께 따라가 본다.
〈힘을 낼 시간〉은 국가인권위원회의 15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입니다. 어떻게 참여를 하게 되셨나요? 평소 인권위에서 제작한 인권 영화들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지고 계셨는지요.
인권영화 ‘여섯 개의 시선’이 나왔을 때 학생이었는데요.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어요. 매번 개성 있는 감독님들이 누가 다루지 않으면 이슈화되기 힘든 주제들을 발랄하게 다뤄주셨던 것 같아요. 〈4등〉이나 〈메기〉 같은 영화는 인권 영화인지 모르고 재미있게 보기도 했고요. 그래서 프로젝트에 대한 연락을 주셨을 때 바로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십개월의 미래〉를 졸업 작품으로 촬영한 뒤, 독립영화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기도 했어요.
영화는 K팝 산업을 경험한 아이돌의 인권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직 영화, 드라마 등 대중문화 콘텐츠로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원래 성장기 캐릭터를 좋아하는데요. 청년 단체를 취재하다가 문득 요즘 친구들이 아이돌 연습생 같은 마음으로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주 열심히 스펙을 쌓으면서 굉장한 경쟁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돌 연습생을 하다가 그만둔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그때부터 취재를 시작했어요.
아이돌이 산업 내에서 경험하는 일들이 디테일하게 묘사되는 영화입니다. 취재 과정은 어땠나요?
공식적인 루트로 아이돌 연습생들의 이야기를 듣기가 어렵더라고요. 아이돌이나 아이돌 연습생 출신 아이들, 또는 그들과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다녔어요. 영화의 사건들은 취재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 누구도 지목하지 않는 캐릭터로 만들었어요. 그럼에도 보편적인 일들이 섞여있을 거예요.
세 주인공들이 거의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트랙을 있는 힘껏 뛰는 모습, 기절하기 직전까지 귤을 따는 모습 등 이런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 것도 이 영화의 힘이라고 보거든요. 이 강박과 불안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셨나요?
아이돌 산업이 계속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책임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 같아요. 예술적 자유성도 일반 아티스트나 배우에 비해서는 제한적이잖아요. 어떤 큰 틀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 일이었으니까요. 극중에서 수민이의 강박은 그런 부분에서 오는 것 같고요. 태희나 사랑이의 경우는 또 다르죠.
수민이가 노력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태희랑 사랑이는 조금씩 결이 다르잖아요. 캐릭터들을 어떻게 완성해 나가셨나요?
수민은 전형적인 리더예요. 리더 출신들을 보면 사회성도 좋고 책임감이 있는 친구들을 시키기도 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면 자신만의 책임이 아닌 것에 대해서까지 책임감을 갖게 되고, 자신을 돌볼 새가 없이 주변을 챙기는 것이 몸에 배게 되는데요. 수민이도 멤버를 잃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활동을 계속했던 수민이의 팀과 달리 태희의 팀은 바로 망해서 활동을 못하고 계약 해지는 안 되는 상황이에요.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도 그냥 웃어 넘기는 성격이에요. 사랑이는 자신만의 세상을 사는 아이에요. 각자 보면 자기 눈에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불안해 보이는데 시점을 바꿔서 보면 본인들도 불안해요. 생각보다 서로가 있어서 의지하면서 산다는 걸 깨닫는 여정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 영화 〈힘을 낼 시간〉의 장면들. 극 중 수민(최성은)과 사랑(하서윤)과 태희(현석우)는 십년간 밤낮으로 일했지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수학여행의 한을 풀기 위해 제주여행에 나선다.
세 캐릭터의 조합이 중요한 부분이었을 것 같은데, 어떤 기준으로 캐스팅을 하셨는지요.
처음에 시나리오를 쓸 때는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많으니 실제로 이 산업을 경험했던 친구들을 캐스팅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취재 진행 후 캐스팅에 들어가는 순간 그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에 대한 사생활 보호도 그렇고, 실제로 촬영에 들어가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꺼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겠더라고요. 성은 배우는 전작 〈십개월의 미래〉에서도 함께했는데 수민처럼 엄청난 노력파이고 책임감도 강해요. 밖으로 터트리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도 비슷하죠. 사랑 역의 서윤 배우는 신인이고, 회사 대표님이 강력히 추천을 하셔서 만나봤는데 굉장히 몰입감 있게 연기를 잘 해요.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성격의 태희는 우석 배우에게 잘 어울렸어요.
피해자는 있지만,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해자와 피해자의 논리로 얘기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닌 것 같아요. 계약으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억지로 하게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할 거예요. 이미 잡혀버린 구조가 끊임없이 정신적 외상을 양산하고 있는 시스템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책임을 물을 곳이 없다는 것이 핵심인 것 같아요. 아이돌 산업뿐만 아니라 현재 청년들이 느끼는 답답함이라고도 생각해요. 해결책을 제시할 순 없지만 그러한 감정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세 명의 캐릭터도 서로의 아픔을 나누지 못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영화 속 사건들을 통해 서로에게 아픔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를 통해 결속력을 만드는 거죠. 그것을 보여주는 것까지가 이 영화의 역할이 아닐까 합니다.
영화는 ‘우리가 여기에 있다’라는 현존을 강조해요. ‘여기에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말 그대로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뜻으로 썼어요. 나라는 존재가 여기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이 감각을 너무 쉽게 잊는 사회인 것 같아요. 아이돌 시스템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을 사람이 아닌 상품으로만 본다는 겁니다. 가혹하죠.
혹시 제작 과정에서 인권영화이기 때문에 좀 더 신경 쓰려고 했던 부분이 있으셨나요?
인권영화가 아니어도 영화는 인권을 지키면서 찍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용적인 부분에 신경을 썼어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부분들이 많았어요. 사람에게 쓸 돈을 빼서 다른 곳에 쓰지 말자고도 결심했어요. 기계보다 사람을 중시해도 잘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마지막으로 인권 영화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영화를 만들며 이전에는 몰랐던 다른 인권 이슈들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게 됐거든요. 외부 아티스트가 게스트로 와서 무언가를 한다는 개념이 재밌고,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재밌고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나올 수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이런 프로세스가 잘 유지됐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장영엽(씨네21 대표이사)
사진. 전재천(포토그래퍼)
진행.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