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가 말한다 [2023.04] #1 〈다음 소희〉가 없길 바라며 내 옆의 소희를 본다
2017년 1월,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갔던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이 저수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영화 <다음 소희>는 전주에서 실제 발생한 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전작 <도희야>에 이어 또다시 묵직한 메시지를 직구로 던진 정주리 감독을 국가인권위원회 박진 사무총장이 만났다.
안녕하세요. 박진입니다.
정주리 감독입니다. 반갑습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조금 바쁩니다.
많이 바쁘셔야 되는데!(웃음).
블록버스터 영화들도 개봉했던데, 그래도 영화 좋다는 입소문이 번지면서 많이들 보고 계신 걸로 압니다. 어떠신지요?
개봉 첫 주말보다 그 이후에 관객이 많았고, 그 다음 주에 더 많았습니다. 저도 놀랬습니다.
〈다음 소희〉 보러 극장으로 갈 때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갔던 터라, 관람객들이 얼마나 계실까 걱정했더랬습니다. 하지만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주말도 아닌 평일 저녁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셨다니… 가벼운 영화도 아닌데 말이에요.
영화 개봉 전 배우들과 나름 홍보 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그것보다는 실제로 영화를 보신 관객들의 입소문 덕분에 많이들 극장으로 와주시는 것 같습니다. 제 영화라서는 아니고요, 영화 자체의 힘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때로는 의무감으로 영화를 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소희〉는 그 의무감이 무색할 정도로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구멍, 그러니까 빈틈이 없는 영화라고 말하고 싶어요. 보는 내내 감독님이 제대로 직구를 던졌구나 싶었고요. 〈다음 소희〉는 어떻게 만들게 된 영화인가요?
2020년 말에 제작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들어보면 좋겠는데 의향이 있느냐고요. 그래서 실제 사건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2017년 초, 전주의 한 콜센터에서 일하던 여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 사건을 다룬 프로그램도 찾아봤는데 충격적이었어요. 어른도 견디기 힘든 엄청난 강도의 감정 노동을 하는 곳에서 왜 고등학생이 일하고 있는지 의문이었어요. 그런데 많이들 하고 있다는 거예요. 물음이 생겼죠. 학교는 왜 이런 곳에 아이들을 보냈지? 전체 교육 시스템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니까 더 납득이 안 됐어요.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알아보고 싶었어요.
준비기간은 얼마나 걸렸나요?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작업에 돌입한 건 2021년 초였고 2022년 1, 2월에 촬영했습니다.
영화를 만들다보면 이 영화가 흥행이 될까 하는 걱정이 생길 것 같아요. 그러면 조미료를 치고 싶은 욕심도 생길 것 같은데요, 어떠셨나요?
처음에 제작사는 큰 규모의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했어요. 그런데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하려고 보니 이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그렇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장르적인 재미나 요소를 가미하는 것이 흥행에는 더 안전한 방법이지만 그렇게 해서는 이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없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큰 규모의 상업적 성공은 거둘 수 없다 하더라도 이야기 자체로 승부를 걸어보고 싶다고 했더니 제작사 대표께서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여 주셨어요. 이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뜻과 방향에 전적으로 동의를 해주셔서 지금의 영화가 나오게 됐습니다.
의도대로 되었군요.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 적어도 원래 취지대로 영화가 만들어졌고 전달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정주리 감독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박진 사무총장과 인터뷰하고 있다.
영화의 제목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네요.
〈다음 소희〉는 해외 관객들을 먼저 만났어요. 영어 제목은 ‘넥스트 소희’입니다. 하지만 ‘넥스트 소희’라고 불렸을 때 보다 ‘다음 소희’라고 했을 때 관객들이 더 풍부하고 다채롭게 해석해 주시는 것 같아요. 암담함도 있지만, 또 다른 희망을 품어보는 차원에서 만든 제목입니다.
감독님은 희망을 말씀하시지만 저는 사실 답답했어요. 특정 가해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잡으면 되는 건데, 관객이 카메라를 내내 따라가도 가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길 잃은 분노만 남는 거죠.
그 말씀이 제가 영화를 준비하고 만들면서 느낀 것과 똑같아요. 답답하고 무기력했죠.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 역시 그 사회 시스템의 일원이라는 자각이 들면 무서운 거죠. 이 사실을 새롭게 인지했어요. 이 영화를 꼭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는 여러 사건으로 보도된 OO군, OO양 하고 지나갔던 이름들이 영화 속에서나마 이름을 갖고, 관객들 마음에 남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어요. 관객은 무력감과 답답함을 느끼시겠지만, 소희라는 아이를 기억해주시고, 그 인물을 기억하려고 했던 유진이라는 존재를 알아주신다면 거기서부터 조금 다른 시작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진(극 중 형사, 배두나)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한 사회인데 그 한 사람이 없는 거잖아요. 영화의 역할은 그걸 환기해주신 점에 있고, 이제 대답은 현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감독으로서 그런 욕심도 있으신가요?
저는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담담하게 현실적인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영화 밖 세상에서의 변화를 꿈꾼다는 것은 그야말로 저의 희망이지요. 이제 실질적으로 그 힘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그 일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조금 더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죠. 소희는 술 취한 남자들에게도 주저 없이 달려들어 따질만큼 당찬 친구잖아요. 그런 소희가 스스로 세상을 뜹니다.
실제 사건을 그리고 있지만 보편적으로는 한 사람이 어떤 고립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가에 대한 영화입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소희는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니”라고 말해요. 주변에 가족과 친구가 있고 핸드폰을 늘 손에 쥐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 소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죠. 그러면 소희는 왜, 어쩌다가 죽음에 이르렀을까. 저는 소희가 선택했다기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그리고 싶었던 겁니다.
소희에게 좋은 어른은 왜 한 명도 없었던 걸까요.
영화로 볼 때는 놓쳐버린 순간들을 안타깝게 느낄 수 있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늘 그런 순간들이죠. 그렇게 늘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이 모여서 영화와 같은 사태를 만들기도 하니까요. 영화 속에서 유진과 소희가 유일하게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도 나중에야 아는 거지만 유진 입장에서는 그때 소희의 표정은 간절한 구조 신호였겠구나 생각할 수 있죠.
영화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인물은 역시나 유진이죠.
사건 당시 전주 민주노총 전북지부 정책국장이셨던 분도 이미 예전부터 목소리를 높이고 계셨어요. 그런 인물들이 총화되서 유진이라는 인물로 형상화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노력을 담고 싶었어요. 그런 분들이 없었다면 사건에 대해 영영 알 수 없었을 거예요.
전지적 관점에서 보면 바꿀 수 있는 것이 많은데 그래서 엔딩 장면에서 유진의 서명이 바뀌는 거죠?
많은 분들이 그 장면을 특별하게 보시더군요. 제가 디렉팅하진 않았어요. 저는 시나리오에 장면을 담은 것뿐이에요. 그런데 인물에 완전하게 동화된 배우가 그렇게 표현한 거죠.
우리 위원회의 역할도 있지요. 위원회는 지난해<특성화고 현장실습생 인권개선 방안 마련 실태 조사>를 했고 정책 검토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위원회가 권고하면 그 권고에 답을 하는 곳들이 있어야겠죠? 그렇게 하나하나 노력해 보겠습니다.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으로 만나길 바랍니다.
녹취와 정리. 인권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