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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023.02] 예속에 맞선 사람들 기록으로서의 세계인권선언문 제4조

글. 김원영(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세계인권선언 75주년> 기획연재 : 다시 읽는 세계인권선언, 첫번째 이야기

 

 

세계인권선언문은 75년 전 인류가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탄생했다. 세계인들의 윤리적 반성과 다짐이 담겨 있다. 얼마간은 승전국들의 국제정치적 전략의 산물이고 시간도 오래 지났지만, 그럼에도 선언문에 담긴 문구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긴 역사의 산물이다. 선언문이 작성된 이후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이 선언문의 내용을 구체화하고,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규범으로 작동하는 이유다. 그 가운데 노예제도 금지를 선언하는 제4조는 오랜 역사와 현재의 인권문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느 누구도 노예상태 또는 예속상태에 놓여지지 아니한다.

모든 형태의 노예제도와 노예매매는 금지된다.”

 

적어도 21세기에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 제도를 굳이 금지하는 별도의 조문이 필요할까? 인간의 존엄(제1조)이나 차별금지(제2조)에 대한 원칙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생각할 수 있다.1) 이 조문을 다시 보자. 제4조는 노예제도를 금지할 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노예상태 또는 예속상태에” 놓이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인권선언 제4조를 구체화하는 「유엔 시민·정치적 권리 규약」 제8조 역시 노예제도, 노예상태와 구별되는 ‘예속상태’를 금지한다.

 

 

상당히 민주적인 정치제도와 시민의식을 갖춘 사회라면(한국도 이에 근접하다), 노예제도를 다룬 인권선언문 제4조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동의하지 않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노예제도 금지’에 신경쓰기보다 그 보장범위와 한계를 두고 사회적 토론이 필요한 제19조 표현의 자유 또는 제22조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가 더 현실적인 관심사일 것이다.

 

그러나 ‘예속상태’는 여전히 우리가 당면한 인권문제다. 현대의 성폭력 사건에서 자주 문제되는 쟁점은 바로 ‘위력’이다. 위력은 말하자면 상대방을 예속의 상태로 두는 힘이다. 직접적인 폭력으로 상대방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는 성폭행만큼 선명한 폭력이 아니지만, 바로 그렇기에 위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더 많은 권력을 지니고 더 교묘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한국 정부의 허가를 통해 입국한 이주노동자들은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특정 사업장에 전속하며 자신이 원한다고 다른 사업장으로 옮길 수 없다. 누군가는 이런 제도 자체를 수긍하고 한국에 들어온 것이라면서 이주노동자에게는 여전히 ‘자유’가 있음을 강조하겠지만, 1970년대 한국인들이 그러했듯 누군가는 가족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 돈을 벌어야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 이런 제도하에서 이주노동자는 언제든 예속상태에 놓일 수 있다. 장애인거주시설에서 30년간 생활한 사람에게 다가가 그가 어떤 주거환경에서 살고 싶은지를 조사하는 경우는 어떤가. “시설을 나가서 밖에서 생활하고 싶으신가요?”라고 물었을 때 그가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고 답한다면, 우리는 그가 복지시설에서 계속 생활하기를 원한다고 기록하면 될까? 그의 삶은 자유로운가?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은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지만 예속상태를 촉발하는 조건은 허용하거나 심지어 조장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인권선언문 제4조를 계속 읽고 말해야 하는 이유다. 제4조는 ‘노예제도’ 옆에 ‘예속상태’ 를 병렬하고 있다. 그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자유로운 의사로 상대방과의 계약을 통해 신분과 경제, 사회생활을 추구해가는 현대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의 이상 하에서도 어느 때 못지 않게 사람에 대한 사람의 지배가 문제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인권과 예속에 대해 살필 때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분명 힘과 권력을 가진 누군가는 당신과 나를 ‘위계’ 또는 소위 ‘가스라이팅’을 통해 지배할 수 있다. 어떤 종류의 경제, 정치, 사회제도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삶의 상황으로 우리 자신을 밀어 넣고, 그 바깥의 선택지가 있는지조차 잊게 만든다. 그러나 75년 전 저 문서가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그저 예속상태에 빠지기 쉬운 개개인을 마침내 국가는 보호한다는 약속이 아니다(그렇게 본다면 그 약속은 꽤 허울뿐일 것이다). 오히려 인권선언문은, 가장 취약한 인간들이 자신의 예속상태에 맞서 용기 있게 저항해왔음을, 열악한 상황에서도 노예와 예속의 삶을 살지 않기로 결정했음을 기록한 증거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수많은 비난과 의심을 감수하고 권력자의 위력을 폭로하는 힘. 평생 생활하던 곳의 비리를 폭로하고 자립을 꿈꾸며 한겨울 노숙을 시작하는 중증장애인들의 결단을 떠올려 보라.2) 인권선언문은 우리가 언제든 노예제도에 버금가는 예속상태에 놓일 수 있지만, 또한 언제든 그것을 깨고 나왔음을 보여주는, 그래서 누구도 우리를 진정으로 예속할 수 없음을 보이는 선명한 기록이다.

 

1) 물론 상업적, 정치적 이유로 사람을 사고 파는 현대판 노예제는 현실에서 만연했고 이를 금지하기 위해 국제사회는 20세기 내내 세부적인 국제인권규범을 발전시켜야 했다. 인신매매 금지 및 타인의 성매매 행위에 의한 착취금지에 관한 협약(1949년), 노예제·노예무역·유사노예 제도와 관행 폐지에 관한 보충 협약(1956년), ILO 강제노동폐지협약 제105호(1957년), 유엔 시민·정치적 권리 규약 제8조(1966년), ILO 최악 형태의 아동노동협약 제182호(1999년) 등이 그것이다.
2) 2009년 구 성람재단 산하 시설 향유의집에서 생활하던 장애인 8인은 향유의 집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와 비리를 세상에 알리고 마로니에 공원으로 나와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대부분의 삶을 시설에서 보낸 중년의 성인들이었다. 이들의 노숙은 장애인탈시설 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관련한 내용은 홍은전 외, 『집으로 가는 길』, 오월의 봄, 20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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