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인권 [2022.03] 함께 기억해야 할 한국의 인권 지도
글 홍성수(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이 땅의 억울한 상처들이 언젠가 소리내 말을 하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 함께할 수 있는 책이 되길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빨리 코로나19 상황이 종식되어 사람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저자 박래군 머리말 중)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박래군 지음 / 클 펴냄 / 2020)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박래군 지음, 한승일 사진 / 클 펴냄 / 2022)
역사적 현장을 통해 인권의 문제를 재조명해 본다는 것. 진부해 보이는 기획이다. 단순히 현장을 둘러보며, 옛날 얘기를 들려주는 안내서 정도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 그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인권이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창작해낸 이론적 구성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한 실천적 산물이라는 점을 다시금 확인시켜주고 있다. 현대 인권이론의 초석이 된 근대 인권선언은 물론이고, 현재에도 모든 인권 논의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는 세계인권선언 역시 역사의 산물이다. 인권이론은 서구의 역사 속에서 발전해왔지만, 한국에도 엄연히 인권의 현장이 있으며, 그 현장에 발 딛고 있는 이론적, 제도적 성과들이 있다. 인권의 이념은 보편적이지만, 그 세부내용과 구체적인 이행은 철저히 현장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보편적 인권이념을 정초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최근에는 국제 인권의 국가별 이행이나 ‘인권의 지역화’(localization)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도 그런 맥락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인권을 말할 것인가? 그 출발점으로 우리 역사의 현장에서 인권의 이념을 재조명한다는 것은 매우 적실한 전략이다. 해외의 인권 현장을 다루는 것이 좀 더 폼이 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인권의 현장을 되돌아보겠다는 것은 전혀 진부한 기획이 아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만석보가 있던 곳.
© 사진작가 한승일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권의 현장들 찾아서
그렇다면 어떤 현장에 가서 무슨 얘기를 함께 나눌 것인가? 인권활동가 박래군의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 인권운동가 박래군의 한국현대사 인권기행」은 제주4·3 현장, 전쟁기념관, 소록도, 광주5·18 현장, 남산 안기부터, 남영동 대공분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마석 모란공원, 세월호참사 현장을 다뤘다. 한국의 ‘인권의 현장’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그렇다고 역사적 사실에 관한 뻔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은 아니다. 평생을 인권운동에 헌신해온 박래군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곳곳에 담겨 있다. 그는 왜 이 현장에서 ‘인권’을 말해야 하는지 힘주어 말한다. 각기 다른 사연이 담겨 있는 현장들이 인권이라는 키워드로 일관되게 재조명된다는 것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독창성이다.
인권활동가 박래군은 후속작인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인권운동가 박래군의 한국현대사 인권기행 2』에서 조금은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이 책에서는 동학농민혁명 현장, 천주교 병인박해 순교성지, 최초의 소수자 인권운동단체인 진주 형평사 현장,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터, 인권침해사건이 일어났던 사회복지시설인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터, 도시개발이 남긴 상처가 있는 광주대단지사건 현장과 용산참사 현장 그리고 백사마을, 노동인권운동가 이소선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서울 청계천·구로·창신동 등을 다룬다. 이런 현장을 선택한 저자의 안목이 빛나는 순간이다. 이 현장들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오히려 이 책은 이 현장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항의하는 것 같다. 심지어 일부 현장은 지금은 아예 사라져 버렸거나 이미 폐허가 된 곳도 있다. 저자의 안내에 따라 일부러 찾아보고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는 곳이다. 어렴풋이 남아 있는 흔적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기에 더 소중하고 애틋한 현장들이다.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에는 사진작가 한승일의 사진이 책의 완성도를 더해주고 있다. 이 책을 위해 찍은 사진 덕분에 현장감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 현장에 직접 가서 그곳의 공기를 마시고 냄새를 맡아 보고 싶어졌다. 이 책을 들고 아직 가보지 못한 몇몇 현장을 가보고 싶었다. 대충 둘러봤던 곳은 다시 한번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다시 가게 된다면 아마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다.
그가 찾아 나설 새로운 현장이 곧 새로운 인권의 역사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후속작을 기대해도 될까’ 생각을 잠시 했다. 박래군의 세 번째 선택은 더 알려지지 않은 곳일 것 같다. 이번에는 국가폭력의 현장보다는 가해자가 누구인지조차 불분명한 사건의 현장을 찾아 나설 것 같다. 인권의 역사가 그동안 인정받지 못했던 권리들을 되찾는 과정이었다면, 그가 찾아 나설 새로운 현장이 곧 새로운 인권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 등 인권단체 활동에 참여하고 있고, 국가인권위원회 혐오차별대응특위 위원 등을 역임하며 인권정책에도 관여하고 있습니다. 법철학·법사회학·인권법을 연구하였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말이 칼이 될 때』, 『법의 이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