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이 자란다 [2020.10] ‘공정성’은 공정한가?
글 김만권 참여사회연구소 소장 (참여연대)
‘공정성’을 둘러싼 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공공의대 학생선발을 둘러싸고 일어난 논쟁, 인천공항공사에서 일어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논란이 대표적이다.
유사한 사례는 찾아보면 너무 많다.
서울시 교통공사 내에서 무기계약직을 일반직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공정성 논란, 심지어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이루어진 남북단일 아이스하키팀 구성에서도 공정성 논란이 일었다. 이런 공정성 논란은 얼마나 ‘공정한’ 것일까?
존 롤스, ‘공정성으로서의 정의’를 내세우다
당대 정의의 핵심이 ‘공정성(fairness)’에 있음을 명확히 한 이론가는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다. 롤스는 사회를 ‘자유롭고 평등한 구성원들간의 공정한 협력체계’로 규정하며, 한 사회의 기본 구조가 권리와 의무를 얼마나 공정하게 분배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가 얼마나 정의로운지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권리와 의무는 어떻게 분배해야 할까? 롤스는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정의의 두 원칙’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기본적 자유의 평등’ 원칙으로, 선거권이나 피선거권, 언론과 집회의 자유, 양심과 사상의 자유, 신체의 자유와 사유재산권, 부당한 체포나 구금을 당하지 않을 자유 등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할당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두 번째 원칙은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규정하고 확립한다. 제2원칙에 따르면 재산과 소득의 분배가 반드시 균등할 필요는 없지만 이런 불평등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특히 사회의 최소 수혜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차등원칙). 그리고 공직을 비롯한 사회적 직책은 누구나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 이 가운데 롤스는 우연한 출생, 타고난 재능 등은 사회경제적 분배의 기준이 될 수 없음도 명확히 했다. 출생과 재능은 일종의 복권과 같이 운에 따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하여 롤스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는 주로 복지국가에서 이뤄지는 ‘재분배’ 정책이 아니라 ‘최초 분배(original distribution)’를 통해 교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복지국가란 일차적으로 시장에서 소득을 얻는 자와, 이차적으로 국가에서 소득을 얻는 자로 분열된 사회라고 봤으며 최초분배가 정의로운 체제를 ‘재산소유민주주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라고 말한다.
태생적으로 모순적인 메리토크라시
롤스가 강조하는 최초분배의 공정성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노동시장에서 최저임금•생활임금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매우 중요한 정책이다. 사회경제적 재화의 최초분배가 대개의 경우 노동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선 혼란스럽게도 이에 대한 반대가 극심하다. 특히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은 곳곳에서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고 있으며, 공정성 논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왜일까?
이런 반발의 중심에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 메리토크라시란 글자 그대로는 ‘능력이 뛰어난 자들의 정체’란 뜻이지만 우리말로는 ‘능력주의’로 불린다. ‘지능(IQ )+노력(effort)=능력(merit)’이라는 등식 아래, ‘개인이 지닌 능력’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개인의 성취를 좌우하는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발상이다. 언뜻 공정해 보이는 이 공식에는 결정적인 함정이 있다. ‘지능’이란 요소자체가 타고난 운이 좌우하는 유전적 요소인데, 운에 좌우되는 요소인 ‘금수저(출생)’의 영향력을 배격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능력주의의 절반은 이미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메리토크라시는 태생적으로 모순적인 발상이다.
더군다나 메리토크라시의 또 다른 중심축인 ‘노력’ 역시 ‘운’에 좌우될 수 있다. 같은 노력을 기울였을 때 체계적으로 교육 받을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 간의 성취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노력’을 강조하지만, 진정한 공정성은 같은 노력을 한 자가 같은 성취를 이루어야 달성된다. 더하여 가족 배경과 같은 ‘운’의 요소는 노력의 기간과 연속성도 보장할 수 있다. 같은 지능을 가진 아이들이 같은 목표를 향해 노력할 때, 일정 정도의 여유 자금을 가진 부모와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는 부모가 뒷받침할 수 있는 정도와 기간은 명확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알고 보면 그토록 공정하다고 외치는 능력주의도 이처럼 운에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능력도 가족이 상속할 수 있는 재산의 일부다.
혐오와 차별로 가득한 공정성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공정성 논의가 공정하지 못한 이유는, 논의의 중심에 혐오와 차별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시험만능주의’라는 잣대 아래 공항청소 노동자들도 정규직이 되려면 ‘토익’ 기준을 통과해야 공정한 세상이 됐다. 하지만 ‘나는 열심히 노력했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주장이 알고 보면 일종의 ‘사다리 걷어차기’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 인생의 고난은 오직 ‘시험공부’에 집중된다. 내가 정규직이 되기 위해 이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노력하지 않은’ 청소노동자가 함부로 이 숭고한 정규직의 자리를 가진단 말인가?
이런 공정성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능력주의를 구성하는 두 요소, ‘지능’과 ‘노력’ 중 자신이 물려 받았을 수도 있는 ‘지능’이라는 선천적 요소를 은연중에 지우고 ‘노력’이라는 요소만을 남긴다. 그리고 이 ‘노력’이라는 요소로 청소노동자를 ‘정규직을 위해 합당한 노력을 하지 않은 게으른 자’로 만든다. 이처럼 청소노동자들이 게으른 자로 전락할 때 이들이 정규직의 자격이 없다고 외치는 자들의 사다리 걷어차기가 정당화된다. 그들은 마땅히 경멸받고 차별받아야 할 ‘무임승차자’에 불과하다. 이 청소노동자들이 새벽 첫차로 출근해 사람들이 없을 때부터 일하는 것, 쉴 곳이 없어 화장실에 쉬는 것, 이 모든 것은 그들이 과거에 노력하지 않고 게을렀기에 치루는 당연한 대가가 된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사람이 정규직 직업을 얻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이 ‘시험공부’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자신이 취업한 현장에서 몇 년 동안 쌓은 경험과 기술은 왜 노력의 결과가 되지 못 하는가? 왜 시험에서 떨어졌다는 이유로, 혹은 시험에 응할 기회가 없는 삶을 살았다는 이유로 게으른 자, 자격 없는 무임승차자로 비난받아야 하는가?
‘인권’에 대한 존중 없는 ‘공정성’
1971년 존 롤스는 ‘정의론’의 역사에서 정의와 공정성을 결합한 기념비적인 이론을 남겼다. 그가 내세운 공정성에는 ‘인간의 권리에 대한 존중’, ‘사회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보호’가 있었다.
롤스는 공정성을 말하며, 사회구성원들로부터 받는 존중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본재(primarygood)’라고 누차 강조했다.
하지만 21세기 우리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능력주의와 결합한 공정성은 ‘인간의 권리에 대한 존중’ 대신 혐오와 차별의 논리로 채워지고 있다. “정의구현 무임승차 놈들아”, “폐급을 폐급이라고 부르지 못하냐!” 무기계약직의 정규직 전환과정에서 서울시교통공사 내부 게시망을 채운 혐오와 차별의 말이다. 결국 무기계약직 직원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 구제를 신청해야만 했다.
인간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세상에 마땅히 경멸받아야 할 사람들은 없다.
누군가는 공부에 재능이 있고, 누군가는 청소에 재능이 있을 것이다. 이 양자 중 왜 공부가 청소보다 더 존중받아야 하는 재능인지를 논리적으로 규명할 길은 없다. 대다수의 우리들은 기존의 사회가 만들어 온 유산 속에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현실 때문에 청소노동자가 된 사람들이 안정된 직장을 얻는다고 하여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그런 것들은 공정성이 아니다. ‘인간을 경멸하고 차별하는 공정성’은 ‘차별의 다른 변명’일 뿐이다. 정의가 부정의를 품고 있다면 정의일 수 없듯, 공정성이 인간을 공정히 대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공정성일 수는 없다. 인간을 공정히 대하는 일은 항상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는 데서 시작한다. 평범한 일상에 함께 하고 있는 동료시민을 ‘폐급’의 존재로 호명하는 곳에서는 ‘공정성’이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김만권 소장은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