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음
[2019.07]
우리 사회의 네거티브 필름
영화 〈기생충〉
글 강유정
한때 자주 사용했지만 세상의 변화와 함께 사라진 단어가 있다. 바로 ‘네거티브 필름’이다. 사진을 필름에 찍어서 인화하던 시절, 카메라를 암실에서 열어 필름을 꺼낸 뒤 약품 용액에 묻혀 네거티브 필름을 얻었다. 현상되기 전 필름에 이미지가 거꾸로 찍혀 있기 때문에 네거티브다. 모든 컬러가 음과 영으로 표현되는 네거티브 필름은 햇빛에 비춰 보면 대상의 윤곽을 더 또렷이 보여준다. 우리가 인화된 사진을 볼 때 윤곽 대신 디테일을 본다면, 네거티브 필름은 그 구조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대한민국 사회의 네거티브 필름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색깔로 덧입혀져 빠르게 흘러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흑과 백, 빛과 어둠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눠 선명히 보여준다. 그래서 <기생충>은 불편한 작품이다. 꽤 공격적이기도 하다.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느끼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 사회의 이면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공격적인 이유는 영화 속에 특별한 선인도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데, 관객으로 하여금 때로는 선인처럼 때로는 악인처럼 느끼게끔 유도하기 때문이다. 단순 명쾌한 대중 영화처럼 관객을 모두 ‘선’으로 몰고 간 후 악당을 처리하는 쾌감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봉준호 감독은 그런 단순함과 명쾌함이야말로 달콤한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영화 초반엔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만 같이 슬렁슬렁 부드럽게 흘러간다. 그러다 중반을 넘어가면서 모조리 꼬이고 얽히고 만다. 갈등의 어원이 칡과 등나무가 얽히듯 풀기 어려운 문제라는 데서 비롯된 단어라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갈등이다. 선과 악이 분명히 나뉘지 않으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한단 말인가?
갈등을 풀지 못한다고 해서 보여주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동시대 예술가들이 해내야 하는 몫이다. 생각하기 불편하고 풀어내기 어렵다고 해서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그것을 우리 눈앞에 명확히 제시하는 것, 그게 바로 동시대 예술가의 일이니 말이다.
사람다운 삶에 대한 질문
영화 <기생충>에는 기생충이 등장하지 않는다. 기생충은 일종의 메타포인 셈이다. 그렇다면 <기생충>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이 바로 그 기생충이라는 비유에 해당하는 것이다. <기생충>에는 언덕 위 유명 건축가가 지은 작품 같은 집에서 살아가는 박사장 가족과 반지하에서 살아가는 기택 가족이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엔 영화 중반부까지 감춰져 있어 등장하지 않는, 아무도 모르게 박사장 집 지하 비밀 공간에서 살아가는 어떤 생명체도 있다. 이렇게 말하면 박사장 집 지하 비밀 공간에 살아가는 그 생명체가 바로 기생충 같다. 기생충은 숙주의 몸에 기생하지만 숙주는 그 사실을 모른다. 마치 박사장 가족이 자신들의 집 지하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도 못하는 것처럼.
문제는 지하라는 거주지에 의해 기생충으로 호명된다면, 그건 그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기생충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즉 여기에서 말하는 기생충이란 어떤 고유한 한 사람에 대한 지칭이 아니라, 스스로의 주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어떤 계층에 대한 호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생충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라 기생충이 돼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그 누구라도 기생충이 돼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사회적 계층의 높낮이와 가진 것의 정도에 따라 누군가의 권리를 규정하는 사회로 바뀌어버린 듯하다. 갑과 을이라는 말이 보편적 명사가 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갑은 더 많은 것을 갖지만, 을은 갑의 눈치를 보며 더 적게 누릴 수밖에 없고 억압당해도 참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더 주목할 것은 이런 문제적 상황이 비단 한국만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가 일반화된 세상에서 경제적 계층은 일종의 신분이자 계급이 돼버렸다. 돈이 가치가 되고, 그것이 인간의 권리를 인증하는 가장 객관적인 수단이 된 것이다. 그래서 <기생충>은 반지하와 같은 매우 한국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에서 모인 심사위원들의 동의를 얻어 황금종려상을 탈 수 있었다. 모양과 이름만 다를 뿐, 세계 각지에서 이러한 경제적 양극화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빈부격차의 이분법적 현실
톨스토이는 “행복한 사람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사람은 갖가지 이유로 불행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세상의 많은 부유한 사람은 비슷한 집에서 살고, 가난한 사람은 갖가지 형태의 집에서 살아간다. 부유한 사람들은 넓고 높은 곳을 차지하고 살아가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판자촌, 꼬방동네, 달동네, 철로변, 보트 위, 쓰레기 더미 등지에서 살아간다. 반지하 방에서 언덕 위 저택으로 이사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은 없다. 계단 밑의 반지하 사람들은 그것을 그저 꿈꿀 뿐이다. <설국열차>에 그나마 연결된 세계가 있었다면 <기생충>에는 연결이 끊어져 있다. 우리는 더 이상 혁명을 꿈꾸기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생충>에 등장하는 세계는 지극히 극단적으로 둘로 나뉜다. 영화에 등장하는 두 가족은 대한민국 4인 표본 가정이라는 물감을 짜서 만들어 낸 데칼코마니의 양쪽 면이다. 한 쪽은 반지하에 사는 4인 가정이다. 그런데 4명을 합쳐도 수입이 거의 없다. 전화기는 모두 있지만 데이터 요금이 없어서 주변 와이파이에 기생하는 처지다. 두 가족의 데칼코마니는 폭우가 내린 다음 날 원색적으로 대조된다. 반지하에 사는 가족은 집이 침수돼 입을 옷 하나 없이 실내 체육관에서 자야 하는 처지가 됐다. 반면 폭우가 내린 다음 날 박사장의 아내 연교(조여정)는 미세먼지 없는 맑은 날이라며 상쾌해 한다. 폭우가 누군가에겐 전 재산을 쓸어버리는 천재지변이 되지만, 누군가에겐 미세 먼지를 날려버리는 천우신조가 됐다.
<설국열차>에 등장했던 꼬리 칸은 <기생충>에서 지하방으로 둔갑했다. <설국열차>가 수평적으로 묘사된 계급사회였다면 <기생충>은 수직적으로 재현된 계층 사회다. 우리를 꺼림직하게 만든 것은 더 이상 계층 이동의 통로나 사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설국열차>의 꼬리 칸 탑승객들은 마침내 앞 칸으로 치고 들어가는 혁명을 일으켰다. 기차 맨 앞 칸까지 가서 기차의 민낯, 그 구조의 핵심까지 들여다보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하지만 <기생충>에 등장하는 반지하 방 가족에겐 꿈을 꾸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 돼 버렸다.
2011년 9월, 99%의 사람들이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를 점령해 1%의 독점을 고발했다. 그것은 1% 독점에 대한 경고였지만, 경고는 공포를 잃고 불가능한 제안이 되고 만 듯하다. 그것은 결국 1%가 차지하는 99% 부에 대한 일종의 예언이 되고 말았다. 그때 시위대를 내려다보며 고가의 와인을 마시던 부유층의 모습은 영화적 연출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시위 자체가 구경거리가 된 그날, 신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경고했던 그날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예언이었다.
훌륭한 예술은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이 불온한 세상을 다시 불편하게 각성시킨다. 세상에 차별과 차이가 있고 그것에 익숙해져 버렸을 뿐 그게 옳은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진실은 언제나 불편하다. 그리고 그 진실을 보여주는 영화도 불편할 수밖에 없다. 영화가 세상에 없는 판타지를 만들고 거기에 불편한 현실을 덧입히면 더 영화답게 다가온다.
강유정 님은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이며 영화 평론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