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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16.05] <유럽인권재판소 판결 읽기 5> 수사목적 비밀감청과 인권침해

글 박성철 그림 이한수

 

수사목적 비밀감청과 인권침해


┃  마약밀매 혐의자 비밀 감청


청구인은 1982년생으로 크로아티아 벨라루카에 살며 선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원양화물선업에 종사하면서 마약밀매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크로아티아 법원은 수사기관의 요청을 받아 청구인을 비밀리에 감시하기 위한 전화 감청을 허가했다.


수사가 더 진행되어 청구인은 마약 밀매 혐의가 인정돼 체포 구금되어 기소되었다. 형사재판에서 청구인은 비밀감시를 통해 얻은 증거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위법 증거로서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9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상소했으나 결국 판결이 확정됐다.


기본권 침해를 이유로 크로아티아 헌법재판소에 심판청구한 헌법소원도 기각됐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청구인은, 유럽인권협약(The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제8조에서 정하는 사생활과 가족생활을 보호받을 권리, 제6조에서 정하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이유로 유럽인권재판소(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에 제소했다[Dragojevic v. Croatiand, App no. 68955/11(ECtHR, 15 January 2015)].


 유럽인권재판소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침해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증거의 위법성에 대해서는 법원에서 충분히 다툴 기회가 있었으며, 감청으로 얻은 증거 외에도 다른 유죄의 증거가 있었다는 근거로 인권침해를 부정했다.


┃  유럽인권재판소, 비밀감청시 합리적 기준과 남용방지 장치 필요


중요한 쟁점은 사생활과 가족생활을 보호받을 권리 침해 여부였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사생활보호 관련 인권협약 위반을 인정했다. 마약 밀매 혐의가 있는 자에 대해서 크로아티아 법률에 따라서 감청이 진행되었다는 점은 받아들였지만, 법률 자체에서 감청 여부에 대한 재량을 판단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감청이 남용되는 사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보호 수단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수사기관의 감청에 대한 정당성 여부는 수사권 남용을 통제할 수 있는 기제가 마련되었는지라는 질문으로 압축되었다. 청구인에 대해서는 4번의 감청 허가가 발급되었는데 감청 필요성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 없이 막연히 다른  수단에 의해서는 수사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허용되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감청의 필요성을 판단할 때에는 범죄 혐의에 대한 소명과 수사할 때에 감청 외에 다른 수단,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덜 침해하는 다른 수사 방법을 취하기는 어렵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이유를 보여주는 사실이 제시되어야 하는데도, 보충적이고 예외적인 수단인 감청을 해야만 하는 개연성에 대한 소명이 없었다고 일갈했다.


특히 크로아티아 헌법재판소 역시 법원이 감청을 허가할 때에는 감청이 필요한 세부적인 이유를 검토하고 이유가 드러나야 한다는 판시를 한 적이 있는데도, 이 사건 청구인에 대한 감청은 합리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 채 허용되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크로아티아 국내 법원이 자신들의 헌법재판소 판례와도 부합하지 않는 요건 상황에서 감청을 만연히 허용한 문제를 심각하게 보았다. 수사기관에서 감청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것만 듣고 이유와 필요성에 대한 자료 심사를 하지도 않은 채 만연히 감청을 승인하고 연장한 행위는 인권협약 위배에 이른다고 판단했다. 감청이 허가되고 3번 연장되는 동안 청구인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수사대상이 되면서도 방어할 방법이 없었고, 법원조차 혐의 사실과 필요성에 대한 심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수사권 남용을 통제할 방법이 취해지지 못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법원의 비밀감시명령허가는 법률에 근거한 것이며 비례의 원칙을 준수하고 있기 때문에 인권침해가 없다고 항변했으나, 감청을 하는 목적의 정당성(범인 검거)만 강조했을 뿐, 감청 외에는 수사 대상의 사생활을 덜 침해하는 다른 수단이 없다는 점과 사생활의 피해에 비해 감청으로 달성하는 공익이 더 크다는 점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  침해의 최소성, 대안적인 방법 강구 했는지 살펴야


유럽인권협약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제한하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정도에 그쳐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딱 필요한 만큼'이라는 기준은 비례의 원칙으로 설명된다. 우리 헌법에서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제한할 수 있다고 정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와 같은 '필요성' 심사는 목적의 정당성만으로 담보되지 않는다. 거칠게 한마디로 표현하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필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목적의 정당성만을 되뇌는 예가 많다. 이 사건에서도 크로아티아 정부는 감청을 하는 목적이 정당하는 입장을 내세웠다. 마약밀매의 유해성과 밀매자를 검거하기 위해 비밀감시를 한다는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필요성을 판단할 때에 목적의 정당성은 최소한의 기준에 불과하다. 만일 목적이 정당하지 않다면 그 수단은 거기서 바로 위법하게 된다. 그러나 인권을 침해하는 수단은 정당한 목적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다. 국가가 위법한 목적을 추구하는 사례는 흔치 않다. 수긍할 만한 목적을 앞세우지만 잘못된 수단을 사용해 인권을 침해하게 된다.


적합하지 않은 방법은 인권을 침해하는 잘못된 수단이다. 결국은 어느 질병도 고치지 못하는 만병통치약처럼 부적절한 수단, 가령 마약공급자를 처벌하지 않고 마약소비자만 중죄로 처벌하는 수단은 마약을 근절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잘못된 방법이다. 이런 어긋난 수단은 숭고한 목적에도 '수단의 적합성' 위배로 인권침해의 굴레를 벗을 수 없게 된다. 이 사건에서 비밀감시는 수단의 적합성 원칙을 충족한다. 감청을 통해 수사 대상자에 오른 사람을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고 검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수단은 되지 못했다. 핵심은 '피해의 최소성 원칙'이다. 다른 덜 침해적인 수단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인권을 덜 침해하는 대안이 있는데도 대안을 취하지 않으면 인권을 침해하는 수단이 되고 만다. 이 사건에서도 감청 요건을 더 강화하는 방법을 취할 수 있었다. 극단적인 예로 수사 당국이 전 국민을 감청한다면 범죄를 더 예방하고 범인을 더 쉽게 검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법보다는 범죄 혐의를 소명하고 감청을 통해 얻으려는 정보와 그와 같은 수단을 취할 수밖에 없는 요건을 심사해 감청을 허가하는 방법이 덜 침익적인 방법이 된다.


대안을 찾는 것은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이 불편할수록 시민은 더 편해지게 된다.



 


박성철 님은 법무법인 지평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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