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돌봄 [2025.11~12] 강태완 1주기, 그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생각
그해 32살이었던 한 청년이 있었다. 전북 김제에 특수장비차를 만드는 공장에서 연구원으로 8개월 간 일했다. 2년제 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곧바로 한 취업이었다. 처음 연구원을 지망했을 때 막연한 두려움이 스멀거렸다. 오랫동안 생산직이나 이삿짐 아르바이트를 해왔기에 연구직은 익숙하지 않은 직무였다. 그래도 발전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욕심 때문에 스스로에게 벅찬 일을 시도하는 건 아닐지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막상 취업하고 업무에 투입되니 연구원으로 지원하길 잘한 것 같았다. 배울 게 태산 같았지만, 하나씩 배울수록 발전한다는 만족감이 컸다. 일도 재밌었다. 월급은 세금 다 떼면 250만 원 정도였다. 모조리 적금을 부었다. 3년 안에 1억을 모으는 게 꿈이었다. 한 달 생활비는 잔업수당으로 충당했다. 잔업을 ‘만땅’하면 50만 원 정도가 나왔다. 이름과 직함이 적힌 명함을 메신저 프로필에 걸어뒀다. 하루라도 빨리 제몫을 해내는 연구원이 돼서 회사에 기여하고 싶었다. 연차가 12개나 생긴 직장인이 됐고 세금을 내는 납세자가 됐다. 나에게도 희망이 생겼다고, 꿈꿀 자격이 있다고, 차츰 한 사회의 구성원이 돼가고 있다고. 그게 뿌듯했다.
그가 꿈을 키우고 있는 공장에서 그의 ‘고향’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의 고향은 경기도 군포시 당동이었다. 그곳에서 초중고도 나오며 20년을 넘게 살았으니, 태어나지만 않았지 깊게 뿌리를 내린 곳이었다. 그런 그가 200km 가까이 떨어진 전북 김제로 온 건 단지 일자리를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지역특화형 거주비자’ 때문이었다. 인구소멸지역에서 5년 일하면 영주권 신청 자격이 주어지는 비자였다. ‘푸렙체렝 타이왕’, 그의 작업복 명찰에는 이런 이름이 박음질돼 있었다.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이었지만, 온전한 이름이 아니었다. 이 이름으로 불린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시간들은 온전한 이름을 되찾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이 과정을 잘 견뎌낸다면 외국인등록증이 아닌 주민등록증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터였다. 청년은 죽었다. 끼임 사고가 원인이었다. 이름은 강태완, 2024년 11월 8일은 그의 기일이다.
‘미등록’이란 벽
‘30대 몽골 출신 이주노동자 사망’ 만약 뉴스에서 그의 죽음을 이렇게 말한다면, 그의 삶의 많은 면들을 함부로 누락시키는 것이다. 그는 5살 때 엄마 손에 이끌려 몽골에서 한국으로 왔다. 그가 중학생 때부터 곁에서 함께 해왔고, 그와 같은 이주아동에게 꿈꿀 자격이 주어지도록 활동했던 이주와인권연구소 김사강 연구위원은 항변했다. “저에게 태완은 이주노동자도, 몽골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태완은 이주아동이었고, 한국어 밖에 못하는 군포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한국어를 하며 한국 문화 속에서 자라났다. 그의 의식은 한국인이라는 경계 안에서 자랐는데, 그의 존재는 한국인이라는 경계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엄마는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법을 이렇게 가르쳐줬다. “억울해도 끝까지 참으라”고, “경찰 조사라도 받게 되면 바로 쫓겨난다”고. 연립주택 반지하방에 살던 시절, 한 중년 남성이 조선족이냐고 묻더니, 다음날 집 앞에 쌓인 폐지에 불이 났다. 경찰에 신고를 하지 못했다. 중학생 때 친구와 싸움이 났고 친구의 부모님은 경찰을 부른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경찰까지 오게 되면 네가 한국에서 쫓겨 날 수 있다.”고. 이런 순간들이 쌓여 스스로 ‘미등록 이주아동’임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그때부터였다. 장난기라는 유년의 특권이 사라진 것은. 점점 움츠러들고 소심해져 갔다. ‘미등록’이란 벽은 그렇게 그의 삶 주위를 에워쌌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그에게 최소한의 보호망도 없었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의해 미등록 이주아동은 18세까지 교육권을 보장받았지만, 이후에는 단속과 추방을 피해 다니는 ‘불법체류자’ 취급을 받았다. 2021년 법무부의 첫 구제대책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성인이 된 이후 자신만 “다른 세계에 갇혀 있”는 것 같았고,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불가능한 일들이 친구들은 한국인이란 이유로 너무 쉽게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이삿짐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같은 짐을 나르는데, 아저씨들은 한 번 하면 8만원을 받고 그는 두세 번은 해야 겨우 5만원이 주어졌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노동자들 사이에도 거대한 벽이 놓여져 있었다. 미등록이란 벽은 그가 죽은 후에도 한동안 그와 엄마 사이를 가로막았다. 엄마는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달려왔지만, 경찰이 조사를 나온 참이었다. 엄마는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병원 밖을 맴돌며 울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법무부의 협조 약속을 받고 출입국•외국인청을 찾아 체류자격(사망자 가족에게 부여하는 G-1-7)받은 후에야 쫓기지 않고 아들과 대면했다. 그의 장례식장 빈소 한쪽 벽에는 어린 시절 사진들을 붙어놓았다. 한겨레 이문영 기자는 이렇게 썼다. “장난기 많고, 웃음도 많고, 친구들도 많은 태완이 사진 속에서 반짝였다. 죽고 난 뒤에야 태완이 그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가진 소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가 그에게서 빼앗은 얼굴이었다.”
기본권이 특권이 되지 않도록
2021년 7월, 29살이 된 그는 말도, 문화도 모르는 몽골에 자진 출국했다. 법무부가 자진 출국 신고를 하고 본국에 돌아가는 미등록 이주민에게 입국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김사강 연구위원을 비롯한 여러 활동가의 노력으로 법무부는 구제대책을 발표했지만, 당시 대책은 국내에서 태어나 15년 이상 체류한 아동만이 대상이었다. 5살에 한국에 온 그는 대상이 되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도는 끝내 그의 삶을 담아내는 데 실패했다. “여기(몽골) 도착한 순간부터 (한국이) 항상 그리웠어요. ‘집에 가고 싶다’ 이런 느낌.”
그는 한국이 그립다고 했다. 한국인으로 자랐으니 당연한 것인데, 그의 그리움은 자꾸만 ‘국민’으로서 당연하게 누리는 기본권이 특권으로 느끼게 한다. 한국에 재입국한 그는 외국인등록증이 나온 후, 건강보험을 신청했고 자신의 명의로 통장을 개설했으며 운전면허를 땄다. ‘국민’이 보기에 별 것도 아닌 기본이 그는 “진짜 너무 좋았다”고 회상했다. 자유롭게 이곳저곳 다니고 싶어 200만 원 주고 중고차를 한 대 샀다. 차를 끌고 공장에서 군포까지 가서 엄마와 드라이브를 했다. 그가 이루고 싶었고 결국 이뤄낸 소원 중 하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공장과 고향, 왕복 400km는 될 그 거리를 오가며 그는 또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가 꾼 꿈들 중에 드라이브 같은 소소한 것들이 다른 이주아동에게도 당연해지는 날이 있지 않을까. 법무부는 2025년 3월로 종료될 예정인 구제대책을 2028년 3월까지 연장했다. 이제 미등록 이주아동이 성인이 되면 대학교에 입학해 유학비자(D-2), 취업비자(E-7), 구직비자(D-10)로 전환해야 한다. 이주아동은 대학이냐 취업이냐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취업이 아닌 다양한 일의 유형들이 생겨나고, 대학만이 아닌 비진학의 삶도 있다. 인생은 직전이 아닌데 비자는 이주아동에게만 직전으로 한 목표를 향해 살아가라고 강요한다. 청년의 이행기는 꿈꿀 틈을 필요로 한다. 두리번거리며 세상 이곳저곳 서성이는 갭 이어(Gap year)의 시간을 보장해줄 수는 없을까. 그를 위해 이들을 ‘임시적’ 존재로 보는 구제대책을 넘어, 출입국관리법에 이들의 권리가 명문화되어야 한다. 어느새 강태완의 1주기가 됐다. 그가 다 이루지 못한 꿈 하나를 마저 이뤄줄 수 있는 한국사회를 살고 싶다.
글 | 조기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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