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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보기 [2025.11~12] #3 바꿀 수 없는 체류자격 학업과 정주의 벽

 

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서 열 살로 넘어가던 2012년, 한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 선택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프간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2008년에 먼저 한국으로 오셨고, 어머니와 네 남매는 4년 동안 떨어져 지내다 마침내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더 안전한 환경과 나은 미래를 주고자 했고, 그 결정 속에서 우리는 한국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13년째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모국인 아프간에서 보낸 시간보다 한국에서의 시간이 더 길어졌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어린 나이에 한국에 왔는데 고향을 아직도 기억하냐”고 묻는다. 하지만 나는 그곳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9년을 산 아프간과 13년을 산 한국은 환경이 너무 달라, 오히려 그 차이가 내 기억을 더 뚜렷하게 만든다. 한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기대에 들떴다. 친구들로부터 더 이상 “아버지가 없는 아이”라는 놀림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그리고 처음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설렘에 가득 차 있었다. 내가 태어난 촌을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던 나에게 한국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부모님과 네 남매가 작은 원룸에서 무더운 여름,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그 설렘은 금세 낯설고 힘겨운 현실이 되었다. 고국과 너무도 다른 한국에서의 적응은 결코 순탄치 않았고, 나는 늘 경직되어 있었다.

 

MIGRANT

 

한국에서 경험한 교육의 힘과 변화


 

친구들과 학업 출발선이 달랐던 나는 9살에 처음으로 학교라는 곳에 가 보았다. 아프간에서는 집 앞에 학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닐 수 없었다. 어머니를 포함해 집안 대대로 여성 중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한국에서 공교육을 받은 내가 유일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남녀 모두 동등하게 교육을 받고 직장을 가질 수 있지만, 탈레반 통치 아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성의 교육적·정치적·경제적·사회적 참여가 철저히 제한된다. 아프간은 2021년 이후로 여성의 교육을 법으로 ‘불법화’한 세계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법적으로는 6학년 이상의 여성이라 칭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남녀를 불문하고 공교육의 현장이 문을 닫은 지 4년이 되어 간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어 참 좋았다. 한국의 언어와 문화, 법을 접하는 매 순간이 내게는 즐거운 배움이자 새로운 도전이었고, 학교에 가면 온전한 나를 만날 수 있었으며 더 넓은 세계를 알아갈 수 있었다.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나는 불안 속성과 갈등에서 느낀 좌절을 오히려 깨달음과 배움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또한 부모님보다 더 빨리 한국어를 습득한 결과, 나는 그들의 그림자가 되어 출입국·병원·고용노동부·인력사무소 등을 전전하며 부모님의 전속 통역사로 살아야 했다. 지금 돌아보면, 열한두 살 무렵 학업에서 느끼는 성취감보다 늘 위축되고 불안해하던 부모님의 일 하나하나를 해결해 줄 때 느꼈던 성취감이 더 컸던 것 같다.

 

부모의 막막한 현실은 곧 나의 현실이었다. 부모가 안정을 느껴야 나도 비로소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일찍이 눈치챘다. 낯선 땅에서 부모님은 우리 남매만을 붙잡고 버티고 있다는 것, 옆에서 소통이 통하는 이도, 챙겨주는 이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이런 우여곡절 많은 상황을 불평하거나 불행하다고 여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고,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은 한 나라의 미래를
여는 열쇠지만, 이를 위해서는
경제적·정치적 안정과 법의 지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바꿀 수 없는 체류자격 학업과 정주의 벽

 

나의 학업과 목표


 

사람이 어떤 관심사를 가지고 전공을 선택하고 직업을 갖게 되는 데에는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경험이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선명히 상반되는 두 국가를 경험한 나는 자연스레 궁금증을 품게 되었다. 분명 아프간과 한국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두 사회의 구조는 이렇게 다를까? 그 질문은 나를 두 나라를 역사적·정치적으로 비교하게 만들었고, 국가의 역사와 수립, 정치적 배경, 국가 정책, 국제 분쟁에 깊은 관심을 갖게 했다. 혼자 고민하며 큰 질문들을 던지던 중 ‘역사학’과 ‘정치외교학’을 알게 되었고, 특히 2021년 8월 15일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보며 이 두 학문을 반드시 공부해야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생겼다.

 

나는 전쟁으로 인해 고국을 떠나 한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특권과 기회를 얻었다. 만약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나 역시 여느 아프간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며, 옳고 그름의 기준조차 바로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고국의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한국에서 교육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결코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배운 것들이 아프가니스탄의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는 막대한 책임감과 조급함을 느낀다. 아프가니스탄은 지금 스스로 일어설 힘이 없다. 나와 같이 외부에서 기회를 얻은 이들이 들어가 일으켜야 한다. 나는 언젠가 아프가니스탄에 돌아가 나라를 재건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 아프가니스탄이 겪는 문제는 여성 교육에만 그치지 않는다. 지속되는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빈곤, 인프라 부족은 국가 재건을 방해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 가운데서도 교육을 핵심으로 삼고, 동시에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재건을 위한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교육은 한 나라의 미래를 여는 열쇠지만, 이를 위해서는 경제적·정치적 안정과 법의 지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의 아픔을 한국과 겹쳐 본다. 한국 또한 전쟁과 권위주의의 시대를 겪었지만, 결국 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은 나와 같은 개발도상국 출신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는 나라가 되었다. 한국에서 살아온 지난 10여 년 동안, 나는 한국이야말로 내가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예시이자 훌륭한 롤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제 2의 고향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내가 태어난 아프가니스탄이 나의 어머니라면, 내가 자라온 대한민국은 나의 아버지다. 나는 그 안에서 ‘인도적 체류자’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인도적 체류자란 난민법이나 출입국관리법에 따라 난민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본국으로 송환될 경우 생명과 신체의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체류 자격이다. 다시 말해, 정식 난민 지위(refugee status)는 아니지만 강제로 돌려보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임시적 허가인 셈이다. 그러나 10여 년 가까이 이곳에서 임시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한국에서 태어나 난 남동생 둘도 예외가 없다. 서류상으로 나와 똑같다. 외국인등록증에 적혀 있는 ‘기타’ 분류에 대해 큰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가 기타로 분류되기에 미성년인 나도 그렇다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고, 또 학교와 집이 내 생활의 범위였고 내게 전 세계였다. 그러나 성년이 되고, 대학에 진학하고, 취업과 미래 설계에 대한 고민하고 있는 지금 나의 비자, 체류자격이 크나 큰 걸림돌이 되고, 이 사회에 속할 수 있게 ‘소속감’을 내어주지 않는다. 외국인등록증에 적힌 단어 하나는 단순한 행정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에도 분류되지 못한 존재, 어느 제도에도 완전히 들어가지 못한 채 보호와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 사람을 상징하고 있다. 이 ‘기타’라는 분류는 나로 하여금 살 수는 있지만 살아갈 수는 없는 자격 속에 머물게 하며, 지금껏 한국에서 자라온 시간을 무력화시키고, 앞으로의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체류자격은
·
정규적인 직업을 갖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며,
·
직업 선택의 자유조차 제한되고,
·
영주권이나 귀화의 기회,그에 이르는 시험조차 응시할 수 없으며,
·
매년 연장 심사를 받아야 하는 불안정성 속에서 살아가야 하며,
·
체류자격 변경을 위한 제도적 통로조차 닫혀 있다.


 

이것은 단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다문화·다인종 사회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마주한 구조적 과제이기도 하다. 2024년 기준, 외국인과 이주민은 전체 인구의 5%를 넘어섰고, OECD 기준으로 한국은 아시아 최초의 다문화 사회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법률적, 제도적, 정책적 공백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한국 사회는 다양성을 마주하면서도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와 같은 인도적 체류자에게 필요한 것은 혜택이나 특혜가 아니다. 단지 공정한 기회다. 제도가 있다면, 그 안에서 정직하게 경쟁하고 평가받으며 사회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더 이상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이곳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미래를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이 다문화 사회로서 성숙해지는 길이자, 내가 이곳에서 배운 민주주의의 가치에 합당한 길이라고 믿는다.

 

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박노해 작가 글 중, 「언제나 사랑이 이긴다」의 한 구절을 공유해드리며, 긴 글을 읽어 주신 분들의 평안과 행복을 기도한다.

 

“춤추고 노래하고 꿈을 꾸고
밥을 벌고 책을 읽고 대화하고
탐험하고 도전하고 깨어지고
함께 앞을 보며 나아가라.”

 

 

글 | 나히드(아프가니스탄 출신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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