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는 시간 [2025.07~08] 지구의 대재앙 속 희망을 찾아 <플로우>
여름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자세 중 하나는 ‘역대급 폭염’이라는 말에 무던해지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올 여름도 예년보다 덥고 습할 것이라는 예고가 잇따른다. 2024년의 지구는 산업화 이후 가장 뜨거웠다. 세계기상기구(WMO)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지구의 평균 기온은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1.55도 상승, 175년 기상 관측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1.5도는 파리기후협정을 통해 국제사회가 약속한 ‘기후 변화 마지노선’으로, 학자들은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지구의 온도가 1.5도 상승하면 생태계가 붕괴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현재 지구는 예고도 없고 전례도 없는 이상 기온과 이상 저온, 집중 호우와 심각한 가뭄으로 회복할 틈도 없이 몸살을 앓는 중이다.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는 개념이 괜히 등장한 게 아니다. 인류세는 오존층 파괴, 해수면 상승, 생물종의 감소 등 인류가 지구 생태계에 미친 영향에 주목해 제안된 지질학적 세기로,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파울 크루첸이 2000년에 제시한 용어다. 지구는 급속히 위험 한계선에 도달 중이고, 그에 대한 원인 제공자이자 책임 당사자인 인간은 인류세의 최후를 쉽게 낙관하지도 쉽게 비관하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 지구에 빚지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공룡의 멸종을 알고 있다. 그러니 지구에서 다시금 생물학적 멸종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지구의 생명체가 멸종한다면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 때문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까. 그에 앞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인류세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엇일까. 2024년 안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과 관객상을 포함해 4관왕을 차지했으며, 202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의 애니메이션 <플로우>는 어쩌면 그리 먼 미래가 아닐지도 모를 어느 시기, 대홍수 속 살아남은 동물들의 표류기를 통해 인류의 미래 혹은 미래의 지구를 상상하게 만든다. 대홍수가 찾아와 모든 것이 물에 잠긴 지구. 인류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 이유를 영화는 설명하지 않지만 상상 가능한 시나리오는 크게 두 가지다. 대홍수로 인류가 멸종했거나 멸종에 앞서 생존 가능한 또다른 행성으로 탈출했거나. 영화는 자연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인간의 이야기에 시간을 할애하는 대신 어느날 갑자기 터전을 잃은 고양이를 길잡이 삼아, 이를테면 화성 이주 계획을 미처 세우지 못한 개와 원숭이와 새들을 하나 둘 여정에 끌어들인다. 떠내려 온 배 한척에 겨우 몸을 실은 주인공 고양이는 순하고 듬직한 골든 리트리버, 급박한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친화력 좋은 카피바라, 반짝이는 물건에 집착하는 여우원숭이, 유일하게 하늘을 날 줄 아는 존재이자 줄곧 배의 키를 잡는 뱀잡이수리와 한 팀이 되어 운명 공동체를 이룬다.
이들은 모두 삶의 터전이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야 하는 운명을 마주한다. 고양이게도 집이 있었을 것이다. 거대한 고양이 동상이 서 있던 집, 배에 몸을 싣기 전까지 고양이가 머물렀던 그 집은 아마도 인간과의 추억이 서린 집이었을 것이다. 카피바라와 여우원숭이와 뱀수리잡이에게도 친구들과 장난치며 놀던 터전이 있었을 것이다. 아끼던 나무와 숲과 강과 길들. 그 모든 것을 뒤로 해야만 하는 <플로우>의 동물들은 모두 ‘버려진 존재들’ 혹은 ‘남겨진 존재들’이다. 만약 대홍수로 인해 인류가 절멸한 게 아니라 지구를 버린 것이라 가정한다면 지구에 남겨진 존재들을 재해에 취약한 계급, 지구를 떠날 비용이 없는 계급으로 치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의 불평등은 대재앙 앞에서도 예외가 없다. 인류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체감하는 고통의 크기는 경제적 계급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더위와 추위, 자연 재해는 가난한 이들에게 더 가혹한 법이다.
비록 버려지고 남겨졌지만 영화 속 동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을 모색한다. 대재앙 이후 자신과는 다른 존재와 함께 하기를 택한 독립성 강한 고양이도 서서히 공존하는 법을 터득해간다. 고양이는 친구들에게 여러번 도움을 받는다. 사교성 좋은 리트리버는 매번 고양이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카피바라의 도움으로 물에 대한 공포심을 극복해 수영하는 법을 익히고, 깊은 물에 빠졌을 땐 고래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도 함께라면 가능하다. 그러니까 생존의 법칙은 ‘함께’ 하는 것이다. 종을 초월한 연대!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힘 때문에 인류의 흔적만 남고 인류는 사라진 디스토피아적 지구의 미래가 디스토피아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세계의 불평등은 대재앙 앞에서도 예외가 없다
영화에는 고양이가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한다. 영화 초반에 한 번, 마지막에 또 한 번. 영화 초반, 고양이는 세상에 혼자 남겨진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며 (아마도) 고양이로서의 고독한 운명과 독립성과 강인한 내면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고양이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고양이의 주위엔 친구들이 함께 있다. 수면에 비친 이미지가 말해주는 건 고양이의 세계가 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화면이 뒤집힌다. 세계가 뒤집힌다. 변화가 생긴 것이다. 자신만을 응시했던 고양이가 세계를 응시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처럼도 읽힌다.
<플로우>는 마치 무성영화처럼 인간의 소리를 배제하지만, 커다란 외침 없이도 선명히 메시지를 전달한다. 힘을 합쳐 서로를 구할 것! 대재앙으로 지구를 표류하게 된 동물들은 이처럼 단순명쾌한 명제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도 희망이 있는 것 아닐까. 우리도 힘을 합쳐 서로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제나 평화로운 카피바라가 ‘그래, 늦은 때란 없지’ 라고 인간에게 말해주지 않을까.
글 | 이주현(전 씨네21 편집장)
본지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우리 위원회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