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4 > 지구인 이야기 > 1995년의 베이징, 그리고 2025년의 서울

지구인 이야기 [2025.03~04] 1995년의 베이징, 그리고 2025년의 서울

 

“여성의 권리는 곧 인권이다(Women’s rights are human rights).”

 

1995년의 베이징, 그리고 2025년의 서울

 

여성 인권을 이야기할 때면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이 명제가 국제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선언된 것은 불과 30년 전,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세계여성대회에서였다. 1945년 세계인권선언의 채택을 시작으로,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 노예제 폐지, 노동권 강화 등 인권의 보편화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여성 인권은 여전히 완전한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여성들은 서로 연대하며 강력한 여성 운동을 전개했고, 이에 유엔은 설립 30주년이 되는 1975년을 ‘세계 여성의 해’로 지정하며 여성 인권 증진을 위한 국제적 논의를 본격화했다.

 

‘세계 여성의 해’ 지정을 통해 유엔은 여성 인권을 국제 사회의 핵심 의제로 공식화했다. 이는 같은 해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제1차 세계여성대회로 이어졌으며, 전 세계 100여 개국의 정부 대표, 시민사회 단체, 여성 운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여성 인권과 성평등 문제를 국제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했다. 대회의 주요 의제는 평등, 개발과 경제적 기회, 평화 증진이었으며, 참가국들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멕시코 행동 계획’을 채택했다. 이 계획은 여성의 정치적 참여 확대, 교육 및 노동 시장에서의 동등한 기회 보장, 여성의 법적 권리 강화, 가부장적 문화와 구조적 차별 철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멕시코시티에서의 논의는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다. 유엔은 1976년부터 1985년까지를 ‘유엔 여성 10년’으로 지정하며 여성 인권 증진을 위한 국제적 노력을 체계적으로 확대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1979년, 유엔은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협약(여성차별철폐협약, CEDAW)을 채택했다. 이는 법적 구속력을 갖춘 최초의 국제 여성 인권 조약으로, 각국의 법률과 정책이 성평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현재 유엔 회원국 193개국 중 189개국이 해당 협약을 비준했으며, 우리나라도 1984년 이를 비준하며 국제적 여성 인권 기준을 따를 것을 공식화했다.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제1차 세계여성대회를 기점으로, 국제사회는 5년마다 여성 인권의 발전을 점검하는 세계여성대회를 개최했다. 1980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차 세계여성대회에서는 여성차별철폐협약의 홍보와 각국 정부의 조속한 비준 촉구가 이루어졌으며, 1985년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3차 세계여성대회에서는 ‘젠더 평등’ 개념이 부각되며 여성 인권을 법적 차원을 넘어 사회·경제·문화적 구조 속에서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논의가 확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5년, 베이징에서 역사적인 제4차 세계여성대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냉전 종식과 국제 정세 변화, 환경과 개발 등 다양한 글로벌 이슈가 맞물리면서, 여성 인권 논의 역시 더욱 포괄적이고 심층적인 차원으로 나아갔다. 이에 따라 제4차 세계여성대회는 기존과 달리 10년 만에 개최되는 예외적인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이후 여성 인권의 전환점을 마련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전 세계 여성단체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돋보였던 제4차 세계여성대회는 지금까지도 성평등 정책의 기준이 되는 가장 중요한 국제 문서 중 하나인 ‘베이징 선언 및 행동계획(Beijing Declaration and Plan of Action)’을 채택했다. 베이징 행동계획은 총 12개 분야: 여성 빈곤, 교육 훈련, 보건, 여성폭력, 무력 분쟁과 여성, 경제구조와 정책, 정치적 의사결정, 제도적 메커니즘, 여성 인권 일반, 여성과 언론, 여성과 환경, 소녀 아동을 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이후 여성지위위원회(Commission on the Status of Women, CSW)를 통해 각국의 이행 정도를 검토해 왔다. 특히 앞서 말한 ‘여성의 권리는 곧 인권이다’라는 선언을 통해 여성 인권이 부차적인 문제가 아닌 보편적 인권의 핵심 요소라는 것을 규정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번 3월 10일부터 21일까지 뉴욕에서 개최되는 제69차 여성지위위원회 회의는 베이징 선언 및 행동계획 채택 30주년을 맞아 열리는 회의로, 전 세계 페미니스트들이 모이는 여성 인권 최대의 현장이 될 것이다. 해당 회의에 앞서 아시아태평양, 유럽, 아프리카, 미주, 서아시아는 각각 소지역 점검 회의를 작년에 개최했으며, 우리나라도 여성가족부를 중심으로 아시아태평양 장관급 회의에 참석해 베이징 선언의 이행 상황을 발표했다.

 

여성의 권리가 인권이라고 외쳤던 베이징 선언으로부터 30년이 지난 2025년 한국의 여성 인권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2022년 기준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OECD 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세계경제포럼 성 격차 지수는 146개국 중 99위로 같은 아시아 국가인 필리핀, 몽골보다도 낮다. 2022년 디지털 성범죄 발생 건수는 전년 대비 두 배로 증가했으며 2024년 예산에서 여성폭력 예방 및 피해자 지원 예산은 대폭 삭감되었다. 강남역 9번 출구, N번방 사건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은 ‘운이 좋아서’ 살았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기울어진 사회에서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심을 느꼈다. 이런 현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묻게 된다. 과연 베이징 선언 이후 30년, 세상은 얼마나 변했는가? 여전히 여성들은 일터에서, 가정에서, 온라인과 거리에서 차별과 폭력에 직면해 있다. 유리천장은 단단하고, 성별임금격차는 좁혀지지 않으며, 여성 안전을 위한 정책과 예산은 후퇴하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흐름이 멈춘 것은 아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여성들은 연대하며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베이징 선언이 남긴 유산은 여전히 유효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 인권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지속적인 행동과 정책, 사회적 인식의 변화로 실현될 수밖에 없다.

 

베이징 선언 이후 30년, 이제는 더 이상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갈 때다. 2025년의 우리는 또다시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라는 외침을 되새길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낼 것인가. 답은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 있다.

 

 

글 | 백가윤(국민인권위원회 국제인권과)

이전 목록 다음 목록

다른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