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돌봄 [2025.03~04] 폐 끼치고 싶지 않았던 청년들
20대 중반에 직장을 다닐 때였다. 업무 뿐 아니라 삶의 태도에도 깊숙하게 관여하고 싶어 하는 상사가 있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처음에는 나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위한 것인지 그 자신을 위한 것인지 헷갈렸다. 나중에는 듣고 싶지 않았지만, 상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무실 분위기를 흩트리지 말자는 마음도 컸다. 나는 그저 ‘예, 예’만 할 뿐이었다. 어느 날 상사가 교육을 하겠다며 주말에 나오라고 했다. 주말은 쉬고 싶었지만, 나는 이미 습관처럼 ‘예’라고 답하고 있었다. 그렇게 주말이 되었을 때, 몸이 집 밖으로 나가지지 않았다. 그건 그저 주말에 상사를 만나기 싫다 정도가 아니었다. 상사와 일한 지난 1년간 ‘예’만 외치다가 어느새 내가 나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그렇게 쌓아온 ‘예’들 속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아서, 내 몸은 출근을 거부했다. 잠수를 타고 싶었다. 만약 이렇게 잠수를 타버리면, ‘모든 순간에 예만 외친 착한 나’와 ‘잠수를 타서 상사 배신한 나’ 사이에 큰 간극이 생길 터였다. 이 간극이 나도 혼란스러워서 꼭 어디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간신히 변명거리를 쥐어짜내서 주말 출근을 면했지만, 이런 상황이 몇 번 더 반복되면 정말이지 잠수를 탈 수 밖에 없을 듯했다.
누군가는 지난 이야기에 일터의 조직문화를 지적할 수 있고, 누군가는 ‘아니오’라는 말 한마디 못하는 나를 나무랄 수 있다. 하지만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어떤 마음이 강렬하게 남는다. 내가 나일 수 없는 상황 속에 갇힌 듯한 마음. 이런 마음을 떠올린 건 책 <웅크린 마음이 방 안에 있다>의 한 문단을 읽고 나서다.
방 안에는 웅크린 마음이 있다
“대부분의 고립·은둔자들은 자기주장을 하거나 자기 욕구를 강하게 드러내기보다 관계 속에서 참고, 맞추고, 양보하고 견디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부모, 선생님 등 주변 사람들은 이들이 늘 착하고 온순해서 크게 속 썩인 적이 없다고 말하곤 한다. 그렇지만 조용한 기운데 이들은 욕구를 누르고 요구에 자신을 맞춰왔을 수 있다.”
지난 10년간 고립·은둔을 겪은 청년들을 상담하고 연구해온 저자 김혜원은 방 안에 웅크리고 오랜 시간을 보낸 청년들의 특징을 이렇게 말했다. 누구 하나 학교 폭력에 ‘가해자’인 적도 없다. 그만큼 누군가를 해한 적 없이 살았다. 방 안에 웅크린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방 안에 웅크리게 되는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이 있다는 말이다.
보건사회연구원의 2022년 실태조사를 보면, 은둔 청년이 외출하지 않는 이유 중 ‘취업이 잘 안되어서’가 35%를 차지했다. 취업이 잘 안돼서보다 더 높은 이유는 ‘기타’로, 45.6%를 차지했다. 명확한 이유가 있어서 은둔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응답은 은둔이 개인의 기질이나 성격보다는 여러 상황 속 요소들이 누적된 결과임을 말해준다. 가정, 학교, 직장, 친밀한 관계에서 부정적이거나 폭력적인 경험들이 누적되고, 그로 인해 내가 나일 수 있는 관계나 자리가 박탈될 때 누군가는 은둔에 내몰린다. 저자 김혜원의 분석은 결국 은둔을 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폐 끼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저자의 분석을 들으면 은둔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20대 중반에 일터에서 했던 경험이 유년기부터 부모에게 겪었더라면? 청소년기 학교에서 내내 겪었다면? 나도 언제든 은둔에 내몰릴 수 있었다.
청년들의 은둔 현상은 주로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 많이 벌어진다. 한국은 이제 막 문제가 가시화됐고 실태조사나 제도적 기반이 만들어지고 있다. 일본은 이미 5080문제가 되어, 청년기에 은둔했던 자녀가 중년이 되고 중년의 부모는 노년이 되어 돌봄을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중국도 평평하게 누워있는다는 뜻의 ‘탕핑?平’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며 사회적 성취에 대한 압력을 거부하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청년들의 은둔 현상이 미국이나 유럽에 없는 것은 아니다. 은둔의 사회적 배경이 다르다. 높은 사회적 기준과 채우고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다가 소진되는 것이 동아시아의 은둔 특징으로 주로 이야기된다면, 미국이나 유럽은 주로 개인의 정신건강이나 빈곤으로 인한 사회적 단절이 주요한 요인으로 지목된다.
학교 밖 청소년에서 은둔까지
사단법인 씨즈의 고립청년지원팀장을 맡고 있는 오오쿠사 미노루는 은둔과 관련된 개념을 단계별로 정의한다. 우선 첫 단계는 등교거부 혹은 학교 밖 청소년이 되는 단계다. 이는 ‘소속’에서의 고립을 촉발한다. 그 다음은 니트 단계다. 니트(NEET, Neither in empioyment nor in education or training)는 직업훈련이나 취업준비 과정에 있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소속 뿐 아니라 ‘활동’에서도 고립됨을 말한다. 그 다음은 고립이다. 물리적으로 단절된 건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단절됐다는 의미에서 ‘사회적 고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관계’에서의 고립감을 강조한다. 다음 단계가 은둔이다. 6개월 이상 주로 집 안에서 생활하고 인간관계를 거의 맺지 않는 상태다. 소식, 활동, 관계 뿐 아니라 ‘공간’에서까지 고립된 것이다.
우리는 이런 개념의 지도가 있기에 주변에 누군가 은둔으로 내몰리고 있진 않은지 살필 수 있다. 등교거부나 학교 밖 청소년은 학교가 아동·청소년의 정신건강에 무신경했음을 말해주고, 니트에게 직업훈련이나 취업준비을 강조하기 전에 어떤 정서적 좌절을 겪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사회적 고립은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이나 고립감을 서로 더 잘 드러낼 수 있어야 함을 알려준다. 남들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두고 능력을 쌓으라고, 학생이나 취준생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라고, 그렇지 않다면 이 사회에서 너의 자리는 없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서로의 마음을 살피고 곁에 머물며 지지하는 관계가 있어야 한다.
“1월에서 3월이 너무 무서워요. 다시 은둔할 거 같아서요.”
은둔 생활을 하다가 지원 프로그램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 한 여성 청년이 말했다. 나를 있는 그대로 환대하는 프로그램이 없는 세상이 무섭다고 했다. 1월부터 3월은 사업을 계획하고 예산이 편성되는 단계이기에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없었다. 참여자를 고려하지 않는 행정 체계도 문제였지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게 프로그램 밖에 없는 것도 문제였다. 프로그램 너머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조금 더 다정해질 수는 없을까?
다정함은 어렵지 않다
독립서점인 ‘공유서재 읽다’에 북토크를 갔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다정함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걸 느낀다. 책방은 주인장이 없을 때도 문을 열어둔다. 와서 책을 보고 머물다 가라는 의미다. 책방이 위치한 서울시 관악구는 청년 1인 가구가 많다. 지역에서 상경한 청년들이 자리 잡기 때문이다. 혼자 서울 생활을 하다가 고립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 번은 한 청년이 말없이 책만 둘러보고 갔다. 다음날, 와서 잠시 책을 읽고 갔고, 그 다음날도 그랬다. 그렇게 1년을 왔는데 말을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주인장은 ‘말을 하고 싶으면 언젠가는 할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어느 날, 그가 여기만 오면 마음이 편해서 책방이 좋다는 말을 건넸다. 그 후로는 같이 점심도 먹고 책도 추천받고 책장도 정리한다. 주인장은 애써 더 다가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거리를 유지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공간, 그것을 ‘장소안도감’이라고 부른다. 장소안도감은 쾌적한 공간으로만 주어지지 않는다. 공간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 속에서 나의 역할과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히 나 자신을 존중할 수 있다. 장소안도감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가 되어야 한다.
글 | 조기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