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가 말하다
[2025.01~02]
#4 만화가들의 인권-진심
창비인권만화 4 『호시탐탐』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하다보면 불가피하게도 약간의 연기력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이를테면, 유명한 저자에게 섭외 전화를 걸어 “아, 선생님. 물론이죠. 제 머릿속에 큰 그림이 쫙 그려져 있고 세부 계획들이 하나하나 수립되어 있으니까요, 너무 걱정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저희랑 같이 좋은 작품 하나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저는 걱정 되는 거 하~나도 없어요.”라고 식은땀 한줄기와 함께 손과 다리를 주체하지 못할 만큼 떨어대며 통화할 때랄까.
2024년 초여름,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인권만화 신간 『호시탐탐』의 저자들과 첫 미팅이 예정되어 있던 날, 나는 한번 더 고도의 연기를 펼쳐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린 채 만화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인권만화 『십시일反』(2003) 『사이시옷』(2006) 『어깨동무』(2013)에 이어 이번 인권만화 신간도 명백히 잘될 일만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큰소리로 섭외했지만, 막상 만화가들을 직접 뵐 날이 오니 쿵쾅대는 심장과 일그러지는 울상을 달랠 길이 없었다. 내 ‘연기력’의 한계는 고작 여기까지였던가.
모든 것을 단념한 채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앞둔 범인의 처지로 만화가들을 맞았다. 목구멍 너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푹 숙인 꼴의 인사를 건넨 뒤 살며시 눈을 들어 만화가들의 면면을 마주했다. 사는 곳도, 성미와 습관도, 장르와 화풍도 서로 다른 8명의 예술가들. 그러나 저마다의 웃음 담긴 인사에는 묘하게 강렬한 일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랬다. 이들이 바다를 건너, 먼 길을 가로질러, 당장 마감해야 할 원고도 제쳐두고 달려온 이유는 나의 누추한 연기력에 속아넘어갔기 때문이 아니라, 인권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시대에 인권을 만화로 그려내겠다는 진심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런 너절한 연기 따위로 이곳까지 발걸음한 것이 아니니 이제 마음 편히 모든 방어기제를 해제하고 어서 진실을 고하라는 듯한 만화가들의 해사한 미소 앞에 나는 그저 “선생님들, 부탁드립니다. 선생님들께서 가장 관심을 갖고 계신 인권 분야에 대한 만화 한편만 그려주세요. 제발요.”라며 자존심 다 내다버리고 찡찡 매달렸다. 인권위에 모인 만화가들의 진심이 과연 어디를 향해 있었는지 그들의 작품 속 명장면들을 통해 만나보자.
김보통 「최후의 보호막」 #노동 #산업재해
넷플릭스 시리즈 『D.P.』를 통해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으로 자리매김한 김보통은 「최후의 보호막」에서 판타지 서사 요소를 가미해 산업재해가 만연한 노동 현장 실태를 고발한다. 마법과 대마왕이 존재하는 세계에서조차 재해와 탄압을 피할 수 없는 주인공들의 형편은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을 서늘히 되돌아보게끔 한다. 위험한 일이 생기고 또 위험한 일이 생기고, 그래서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는 노동 현장에 대고 주인공은 소리친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일을 좀 안전하게, 사람답게 할 수는 없냐는 거야!”
서이레·요니요니 「청첩장 도둑」 #가족 #성소수자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원작이자 2024 부천만화대상 수상에 빛나는 『정년이』의 서이레와 독보적 화풍으로 독자들을 홀리는 요니요니가 합작한 「청첩장 도둑」은 가족의 자랑거리였던 ‘엄친딸’의 특별한 청첩장 소식을 통해 뿌리 깊게 박힌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서이레의 작가 후기가 인상 깊다. ‘왜 어떤 가족은 지켜야 할 가족이고, 어떤 가족은 사라져야 할 가족일까?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얄팍한 논리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꾸릴 수 있길 바란다.’
김금숙 「섬」 #지역소멸 #초고령화
만화계의 오스카로 불리는 ‘하비상’의 역대 최초 한국인 수상자 김금숙은 한국사회가 맞닥뜨린 지역소멸과 초고령화라는 이중적 과제를 절묘하게 교차시키며 아기자기한 작화 속 실존적 섬뜩함을 내포한 수작 「섬」을 탄생시켰다. 김금숙이라는 만화 대가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지 감히 가늠조차 못하게 만드는 인권만화 시리즈 최초의 미스테리 호러 스릴러 서스펜스 반전 결말 작품이다.
김정연 「수수께끼」 #돌봄
만화가들이 사랑하는 만화가 김정연은 「수수께끼」에서 발군의 사실적 묘사와 촌철살인 대사를 선보이며 우리 생애 도처에 늘 필요하지만 여전히 제대로 명명되고 인정받지 못하는 ‘돌봄’의 문제를 소환한다. 모두에게, 어디에나, 언제든지 필요한 ‘돌봄’은 왜 자꾸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걸까? 읽을수록 탁월한 명작으로, 담당편집자 최애작이다.
구희 「폭염 속을 달리는 방법」 #기후위기
한국 최초 기후위기 전문 만화로 이름을 알린 구희의 「폭염 속을 달리는 방법」은 4월부터 열대야가 찾아오는 10여년 뒤 미래세대 청소년들이 맞닥뜨릴 ‘비일상적 일상’을 청량한 작화 속에 대비적으로 담아내어 기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수면 위로 끄집어낸다. 인류 모두에게 공평할 것만 같은 환경파괴의 습격마저도 실은 취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맞닥뜨려야 하는 불편하고 불평등한 진실을 직격한다. 오직 이 작품에만 달린 작가 코멘터리 만화는 기후위기 관련 지식을 알차게 담아냈다.
정영롱 「끄나빠」 #이주배경세대 #청소년
‘오늘의 우리만화’ 수상으로 실력과 대중성 모두 인정받은 정영롱은 「끄나빠」에서 이주배경 청소년과 그 친구들이 겪어내고 있는 사회적 모순과 인종적 차별을 4컷 만화 형식을 통해 유쾌하고 속도감 있게, 그러나 세심하게 짚어낸다. 인도네시아에서 전학 온 닐루,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엄마가 외국인인 노아, 한국의 극한 경쟁 사회에서 자라온 지후 셋이 모여 펼쳐내는 심포니에 귀 기울여 보자. 참고로, ‘끄나빠’는 한국어로 ‘왜?’라는 뜻.
최경민 「참교육」 #사적제재
독창적 시각과 화법으로 만화 마니아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최경민의 「참교육」은 ‘왜 가해자의 인권을 챙겨주느냐’는 논쟁적 화두를 울림 있는 대화로 묘파하면서 사적제재와 인권의식을 어떻게 연결 지을 수 있는지 심도 깊은 토론거리를 제안한다. 어쩌면 가장 어려울 수 있는 주제를 주저 없이 택한 작가의 의지가 묵직한 고민을 거쳐 촘촘한 대화 시퀀스로 재탄생했기에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 읽을 만하다.
글/그림 | 하빛(창비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