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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5.01~02] #3 민주주의와 인권, 어떻게 지킬 것인가

 

민주주의와 인권, 어떻게 지킬 것인가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그날 밤 계엄군이 수행한 활동들의 위법, 위헌, 내란 여부에 대해 검찰, 경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고 법원 및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남아 있다. 그러한 사법적 판단과 별개로 이 사건에 대한 학문적 해석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 속에서 12·3 비상계엄은 전두환 신군부 권력이 1980년 광주학살 하루 전인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내린 후 44년 만의 계엄 선포이자, 세계적 관점에서 본다면 경제선진국들의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 가운데 최초의 계엄이다. 또한 12·3 계엄을 쿠데타로 본다면 이는 영화 <서울의 봄>의 소재이기도 한 1979년 12·12 군사쿠데타 이후 45년 만의 군사반란이며, 오늘날 발전된 민주주의 체제로 평가받아 온 국가들 가운데 쿠데타에 의해 헌정 체제가 붕괴될 위험에 놓인 유일무이한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학문적으로 12·3 비상계엄은 ‘친위쿠데타’로 규정할 수 있다. 이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획득한 통치자나 통치 집단이 그 권력을 영구화하기 위해 자신에게 권력을 부여한 바로 그 헌정 체제를 전복하는 행위를 뜻한다. 그와 유사하게 우리말로 ‘친위쿠데타’라는 말은 남의 권력을 강탈하기 위한 쿠데타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쿠데타라는 의미다. 한국 정치체제의 맥락에서 이것의 의미는,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서 선출된 대통령과 정권이 그 권력을 영구화하기 위해서 민주주의 체제를 전복시킨다는 것이다.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이용해서 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제정 사고에 갇힌 포고령

 

12·3 계엄에 민주적 헌정 체제를 부정하고 전복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많은 근거가 있다. 대통령에게 선포권이 있는 ‘계엄’이, 마치 대통령과 계엄군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해다. 그것은 전제정(despotism)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 중세 왕정에서도 왕과 왕의 군대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경우는 없었다. 대한민국 헌법 77조는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그 조건을 규정하여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제한하고 있다. 이에 상응하여 계엄법 11조는 “국회가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경우에는 [대통령은]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고 이를 공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12·3 계엄은 원천적으로 이러한 민주적 헌법 정신과 규범을 파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포고령 1호?의 제1항은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엄령으로도 국회와 정당 활동은 금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계엄 선포권을 남용할 수 없도록 헌법과 계엄법이 국회의 계엄해제 요구권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포고령 제2항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는 규정도 전체주의적 내용이다. 포고령은 “위반자에 대해서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한다.”고 했는데 이는 계엄법 외에 어떤 법도 없는 공포통치를 암시한다. 계엄 선포 담화문과 포고령에 여러 번 등장하는 ‘처단’이라는 단어는 자의적 국가폭력을 암시하는 이례적 언어다. 비상계엄과 포고령의 반민주적, 반인권적 내용과 더불어, 그날 밤 군과 경찰이 수행한 실제 활동 역시 민주헌정을 전복하는 ‘쿠데타’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헌법과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령으로 국회를 봉쇄하거나 국회의원들을 체포할 수 없음에도 계엄 선포 직후 경찰은 국회를 봉쇄했다. 대북 작전을 수행하는 최정예 707 특수임무단이 헬기로 국회에 투입되어 유리창을 깨고 내부로 진입했다. 국회의원들이 계엄 해제 요구안을 의결하기 위해 긴급히 국회로 향했지만, 자칫 회의장 입장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계엄 선포 후 수천 명의 시민들이 국회 앞으로 뛰쳐나가 국회의원들의 국회 진입을 도운 덕분에, 그리고 투입된 군인들이 지휘관의 쿠데타 명령을 그대로 이행하지 않고 시민들과 국회 직원, 의원들의 안전을 존중한 덕분에, 12월 4일 1시 1분에 가까스로 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되었다.

 

민주주의와 인권, 어떻게 지킬 것인가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검찰, 경찰, 국방부 등의 조사결과와 군 지휘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계엄군은 여야 정당 대표와 국회의장, 언론인, 종교인,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체포, 감금, 사살하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지난 총선을 ‘부정선거’로 만들어 국회를 해산하고 독재적 입법기구를 수립할 명분을 조작하기 위해 중앙선관위원회 위원들을 납치·고문하는 계획을 수행하고 있었다. 여기에 투입된 군 특수부대원들이 소지한 물품은 야구방망이, 송곳, 망치, 작두기 등, 허위진술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 도구들로 가득했다. 이런 실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현대사에서 ‘익숙한’ 4·3과 5·18 등의 국가폭력이 원형 그대로 되살아난 것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결코 잠시의 해프닝이나 장난이 아니라, 위태로운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 현실에 대한 뼈아픈 성찰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87년 체제의 교훈과 과제

 

12·3 비상계엄 사태는 모범적인 ‘민주주의 공고화’ 사례로 꼽혔던 한국의 민주주의가 실제로는 매우 허약하다는 불행한 진실을 일깨워주었다. 학문적으로 ‘민주주의 공고화’란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한 나라들이 독재로 회귀할 위험이 거의 제거된 상태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어떤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여러 기준을 그동안 학자들이 발전시켜 왔는데, 그중 하나의 중요한 지표는 민주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심각한 실질적 시도가 있었는가, 그리고 정치적 불만과 갈등을 민주적 헌정 제도의 틀 안에서 표출하는가 여부다. 이 점에서 군의 국회 진입과 체포 작전들은 그것이 성공했건 아니건 간에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려는 실질적 시도였다. 또한 야당이나 국회에 대한 불만 표출이 민주적 제도 안에서가 아니라, 민주적 제도 자체를 전복시키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사실도 한국 민주주의가 독재로 회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민주주의와 인권, 어떻게 지킬 것인가

 

민주주의 공고화의 또 하나의 지표는 ‘정치의 탈군부화’와 ‘군부의 탈정치화’다. 이 점에서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전두환 신군부의 핵심 기반인 ‘하나회’를 해체하고 군 내에서 세력을 잃게 만든 사건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에 군의 핵심 부대인 특전사, 수방사, 방첩사, 정보사 지휘부의 많은 장성과 장교들이 쿠데타 모의에 관여했다는 사실은 87년 민주화 이후 제거된 것으로 간주되어 온 군의 정치적 야심과 관여가 부활했음을 뜻한다. 이런 측면에서 12·3 계엄은 우리 사회가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함에 대한 안이한 자만을 버리고 철저히 문제를 규명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19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에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원인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권력이 집중된 정치제도의 폐해다. 이 문제는 87년 민주화 이후 줄곧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으로 자주 지적되었다. 정치지도자를 민주적으로 선출하긴 하는데, 선거의 승자에게 너무 큰 권력이 주어지고 이를 견제할 힘이 약하다. 이런 구조에서는 만약 대통령으로 선출된 인물이 민주주의와 시민 기본권을 중시하는 인물이라면 그 방향으로 정책과 제도를 힘 있게 개혁할 수 있다. 반대로 만약 대통령이 민주적 규범과 가치를 무시하는 인물이라면 이런 종류의 권력구조는 매우 위험해진다. 대통령이 행정부와 검경, 군, 정보기관 등 국가기구를 정치 도구로, 심지어 대통령의 수족으로 만들 여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와 같은 중앙집중적 권력구조 안에서 정치적 적대와 극단주의가 증가하면 그 위험이 배가된다. 전체 유권자를 놓고 봤을 때 증오와 반목이 얼마나 광범위한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최소한 정치인들과 정치 고관여층 시민들의 경우 극한의 대립이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심해져 온 것은 사실이다. 권력이 고도로 집중된 제도 환경 안에서 이처럼 적대성이 격화되면, 집권세력이 갖고 있는 권력을 상대편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런 조건에서 만약 집권세력이 민주적 규범을 위반하면서까지 권력을 유지하려 하거나, 심지어 민주적 규범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거추장스러운 구속이라고 여기는 집단이라면, 민주주의 체제 전복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민주주의와 인권, 어떻게 지킬 것인가

 

그렇다면 민주주의와 시민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첫째, 권력집중의 폐해를 줄이기 위한 제도 개혁이 중요하다. 정치권에선 통치구조 개혁안 등이 토론되고 있지만, 단기간에 정치제도를 바꾸는 결정을 내리고 사회적 합의까지 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정치제도 개혁 논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제도의 ‘디테일’이다. 비민주적 정치권력은 대통령제든 내각제든 그것을 무시하거나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는 합법성을 포장하기 위해 악용할 수 있는 제도적 약점이 없는가, 또는 권력남용을 저지할 수 있는 세밀한 제도적 장치가 있는가다.

 

둘째, 제도 못지않게 행위자의 변화가 중요하다. 선진국의 제도를 후진국이 도입한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제든 내각제든 나름의 약점이 있다. 비민주적 정치세력이 집권하면 어떤 정치제도든 그 제도의 약점을 악용하거나 제도를 무시할 것이다. 따라서 민주적 소양과 정책 역량을 가진 정치엘리트를 양성하고 이들이 정치계급의 상층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와 더불어 시민사회의 민주적 결사체들을 더욱 넓고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한국의 시민사회가 침체했느냐 확대되었느냐 논쟁들이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번 시민집회에 전국 각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시민사회 결사체 깃발들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제 이러한 결사체들의 인적, 조직적 지속 가능성을 공고히 하는 것이 국가권력의 전제화에 맞서는 시민사회의 방벽을 만드는 길이다. 독일의 철학자인 에른스트 트뢸치는 1922년 당시 최고 수준의 헌법 제도를 가졌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 공화주의자 없는 공화국?에 관한 글을 썼는데, 그 요지는 민주주의나 공화국의 공식적 제도가 존재해도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가치와 규범을 체화하지 못했다면 그 제도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과제들은 큰 제도 개혁 못지않게, 또는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셋째,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차별과 계급사회의 현실을 개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경악스러웠던 부분은 계엄 선포라는 형식적 측면보다는 국민의 생명과 기본권을 중시하지 않는 폭력적 구상이었다. 국민의 양심과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정치활동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군대의 힘으로 완전히 금지하고 통제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발상 자체가 충격적이다. 그 저변에 깔린 전제는 국민을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수거’, ‘처리’할 존재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이다. 국가기관과 정치권력에 이런 시각이 만연해 있는 상태는 ‘제노사이드’, 즉 특정 인종이나 민족, 또는 ‘빨갱이’, ‘종북’, ‘공산주의자’ 등 이데올로기적으로 낙인 찍인 집단에 대한 조직적 대량 살상의 잠재적 위험을 내포한다. 한국에서 정부, 정당, 군, 기업, 학계, 종교 등 모든 부문의 상류층은 자기들이 속한 클래스 아래 사람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갑질’의 행태를 보여왔다.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빈민, 실업자, 저학력자, 여성,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자를 그런 식으로 ‘비인간화’하여 혐오한다. 이런 사회적 폭력에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거나 심지어 그것을 동원, 증폭하는 정치권력은 모든 시민에 대한 국가폭력에도 무감할 수 있다. 이처럼 국가폭력의 거악과 사회의 미시적 악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정치적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방어하기 위한 노력은 모든 종류의 사회적 폭력과 차별, 불평등 해결을 유예하는 것이 아니라 포함해야만 한다.

 

 

민주주의와 인권, 어떻게 지킬 것인가

 

비현실적 현실을 경험한 한국사회는 이제 12·3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정치제도 개혁과 국가 민주화, 정치엘리트 개혁과 시민사회 강화, 그리고 사회문화적 차별과 불평등 극복이라는 과제를 달성하는 것은 추상적 이상의 추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생존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다.

 

 

글 | 신진욱(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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