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로 보는 인권 [2024.11~12] 인권의 제도화, 멀고 먼 여정
우리나라에 국가인권기구가 알려진 것은 1993년 6월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한 뒤였다. 유엔에서는 “개별국가 단위에서 국내기구이면서도 국제규범을 효과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국가인권기구를 설치하는 일”을 각국에 권고하고 있었다. 군사독재정권과 투쟁 속에서 성장했던 국내의 인권활동가들은 비엔나에서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알던 인권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어서 세계 곳곳에서 인권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물 안에 갇혀 있던 나 같은 활동가들에게는 드넓은 세상을 만난 것 같은 충격이었다. 인권운동은 정치범 석방 투쟁, 고문 추방 운동과 같은 좁은 범위를 넘어서 인간의 모든 삶 속에서 권리를 실현하려는 운동으로 발전해가고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나는 그 대회에 참가한 뒤 벅찬 감격으로 인권운동을 내 평생의 업으로 받아들였다.
그곳에서 들었던 게 국가인권위원회였다. 인권을 침해하고, 탄압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국가가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국제기준을 이행하고 실현해 가도록 감시하고, 견인하는 국가인권기구는 훨씬 낯설었다. 비엔나 인권대회에 참가했던 인권운동가들은 국내로 들어온 다음 국가인권기구의 설치를 위한 논의들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국가인권기구가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되었다. 법무부는 그해 4월에 ‘국민인권기구설립준비단’을 발족하고, 같은해 10월에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을 만들어 공청회를 열었다. 법무부 주도의 법 제정 작업이 가속화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인권단체의 입장에서는 법무부가 주도하는 국가인권위원회 설치 작업이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법무부는 인권위원회를 법무부 특수법인, 즉 산하 기구로 만드는 안을 발표했다. 이것은 유엔에서 제시한 국가인권기구 설립 원칙(파리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법무부 산하의 특수법인이 수사기관의 인권침해를 제대로 감시할 수 있을까?
인권단체를 비롯한 70여 시민단체들은 1998년 9월에 ‘인권법 제정 및 국가인권기구 설치 민간단체 공동추진위원회’(공추위)를 구성하였고, 1999년 4월에는 ‘올바른 국가인권기구 실현을 위한 민간단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로 확대, 개편하여 정부와 국회의 움직임에 대응해갔다. 독립적이고, 실효성 있는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논의는 당정간의 합의도 잘되지 않으면서 무산될 수 있는 상황을 맞았다.
2000년 12월 28일, 전국의 인권활동가들이 명동성당 들머리에 모였다. 혹한의 추위가 엄습하였고, 폭설이 내리는데 천막 하나 치지 않고, 바닥에는 스티로폼을 깔고 침낭과 이불 덮고, 그 위에 비닐을 덮고 잠을 자는 혹한기 농성에 돌입했다. 그때 인권활동가들은 “가라! 국가보안법, 오라! 국가인권위원회”를 구호로 내걸었다.
혹한의 연말연시를 혹한의 추위를 이기며 단식농성을 한 것이 알려지면서 정치권에서 인권위법 제정을 위한 논의가 새로 시작되었다. 그런 결과로 2001년 4월 30일, 국가인권위원회법이 찬성 137, 반대 133으로 통과되었다. 찬반의 표차가 겨우 3표였다. 부족한 게 많지만, “헌정사상 처음으로 입법부·사법부·행정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된 국가기구이자, 인권침해 행위에 대한 제도적 구제 수단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2001년 11월 25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1993년 비엔나 인권대회로부터는 8년 만이었다.
인권조례의 시련
국가인권위원회는 설립 이후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먼저 인권사각지대였던 군과 감옥,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직접 조사가 가능해지면서 이들 시설 내에서 일어나던 인권침해를 감시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들 시설에서 인권침해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국가권력기관들의 인권침해 진정을 받아서 조사도 하고, 권고도 하면서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도 많이 감소시켰다. 차별과 관련한 진정사건 처리 사례들이 늘면서 우리 사회의 인권감수성을 높여왔다. 정책 권고를 통해서 국가의 인권정책 수립 방향을 견인하기도 했다. 또, 인권교육을 진행하면서 인권의식 향상을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해왔다.
그런 중에 국가인권위원회는 2012년 4월, ‘인권기본조례 표준안’을 만든 뒤 전국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인권기본조례 제정 및 개정 권고’를 하였다. 그 뒤 전국 17개 광역시도에 인권조례가 만들어졌고, 기초단체 중 절반 정도에도 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 학생인권조례도 7개 광역시도에서 만들어졌다. 그 외에도 장애인, 이주민, 여성,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 증진을 위한 인권조례들이 속속 제정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인권조례들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느냐에 있다. 가장 먼저는 지자체장이 의지를 갖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인권조례가 폐기되기도 하고, 조례는 있으되 시행은 되지 않거나, 있더라도 예산과 인원 배정이 되지 않아서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다. 충남에서는 인권조례가 폐지되었고, 서울에서는 학생인권조례가 시의회에서 폐지안이 통과되었다.
대전에서는 무자격자를 인권센터장으로 앉혀서 인권센터를 무력화시켰다. 이런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면서 지자체 차원의 인권의 제도화가 후퇴되고 있다. 최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경기도교육청 산하의 도서관들에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같은 작품이 사라진 게 부각되기도 했다. 사실 경기도 내의 교육청에서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성교육, 페미니즘 관련한 책들이 유해 도서로 지목되어 사라지고 있다.
인권의 제도화를 위한 고민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고, 시행되고 나서 학교 현장에서 체벌을 비롯한 인권침해가 사라져갔다. 10년 전만 해도 만연했던 부조리한 학교 교칙들도 개정되었다. 실제로 인권의 제도화가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확인한 사례들이다. 인권조례가 제대로 시행되는 곳에서는 인권옹호관들이 활동하게 되고, 이들이 현장 조사도 하고, 시정명령도 내리면서 현장을 변화시킨다. 국가인권위원회 지역 사무소는 이런 활동들을 지원할 수 있다. 이처럼 인권의 제도화는 국가(지방자치단체 포함)의 3중의 의무(인권의 존중, 보호, 실현)를 구체적으로 이행시키는 중요한 동력이다. 촘촘한 인권 관련 법률들과 그에 근거한 인권기구들이 활동을 해가면 그만큼 인권은 추상적인 덕목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체감할 수 있는 가치로 자리잡게 된다. 서로를 존중하면서 함께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아가는 인권의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래로부터 인권의 가치가 실현되면, 민주주의 토대가 단단해지지 않을까?
인권 관련 법률들의 제정을 통해서 조례의 법적 근거를 만들어야 하고, 이런 법률에 기초해서 인권기구들이 기초단체까지 제대로 만들어져야 한다. 정치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특정 종교에도 휘둘리지 않고, 지자체장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 인권기구들이어야 실제로 인권의 향상을 위한 틀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인권기구들은 단지 진정 사건을 접수하고, 처리하는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시민들을 인권의 주체로 세워가는 능동적인 역할까지 해가야 한다. 그래서 지역에 인권문화가 뿌리내린다면, 우리는 미래를 위한 엄청난 동력을 확보하게 된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 어떻게 하면 가능하게 할까? 지금은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다. 그렇지만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그래서 모두가 더불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포기할 수 없다. 이럴 때일수록 인권의 꿈은 꺾이지 않아야 하고, 더 단단해져야 한다. 이 시기를 건넌 뒤에 더 강해지고, 넓어진 인권공동체가 보고 싶다.
글쓴이 박래군은 인권운동가로 4·16재단 상임이사,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
글 | 박래군(4.16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