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기 [2024.11~12] #2 올림픽 인권, 1896~2024
평등주의자의 차별(?)
1896년 근대 올림픽을 창시한 쿠베르탱은 세계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경쟁하고, 평화와 화합의 장이 되기를 바랐다. 그의 의도는 “모든 스포츠는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에 잘 나타난다. 의심할 나위 없이 ‘모든 사람’은 인권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그는 평등주의자로 불렸다. 하지만 쿠베르탱의 ‘스포츠를 하는 모든 사람’ 중 여성과 특정 민족의 참여는 빠져 있었다. 그는 여성의 역할에 대해 ‘메달 수여식에서 메달을 나르는 역할’로 규정하거나 “실용적이지 않고, 재미도 없고, 보기에도 좋지 않고 부적절하다.”고 평가하며 선을 그었다. 특히 여성의 육상 경기 참여에 대해, 힘들어 하는 여성의 모습을 보면서 좋아하는 남성들에게 반감을 표했다. 그 결과, 제1회 아테네올림픽은 고대 올림픽이 그랬던 것처럼 여성을 배제한 남성들만의 축제로 출발했다. 그는 올림픽 정신에 평등을 불어넣은 장본인이지만, 차별주의자와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말, 성평등은 딱 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2024년 파리올림픽에선 우리에게 낯선 종목들이 꽤 있었다. 3X3 농구, 7인제 럭비, 마라톤 수영, 브레이킹, 사이클 BMX, 트램폴린 같은 것들이다. 시대에 따라 올림픽 경기 종목들도 생겨나고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올림픽 종목 중에는 인권이라는 가치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종목도 꽤 있었다. ‘인명구조’는 익수자를 구조하여 응급조치를 하는 경기인데, 사망자가 나오면서 폐지되었다. 포격 경기는 대포를 쏘아대는 통에 민가가 파괴되는 사고까지 있었다. 싱글스틱은 목검을 들고 상대 이마를 때려 먼저 피가 나도록 하면 승리하는 종목이었다. 이런 종목들은 누군가 재미를 기대하며 도입했지만, 세상의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지 못해 퇴출되었다. 그런 면에서 스포츠도 영속적이지 못하고, 사회일반의 가치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스포츠의 본질은 신체적 기량의 경쟁에 있고, 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개인의 노력은 숭고하다. 무료한 현대 사회에서 빠른 결과가 도출되는 스포츠의 매력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으며, 그것은 산업적 폭발력까지 더해 갈수록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스포츠 관람문화가 고개를 들던 한 세기 전부터 우려되는 지점이었는데, 주류의 시각은 스포츠의 교육적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소위 아마추어리즘이라는 가치관이 스포츠에 남아있기를 바랐다.
한마디로 악의 없는 순수한 경쟁에 있어서 ‘과정’은 스포츠가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가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첨예한 경쟁에서 나타나는 승리지상주의는 승자 독식의 구조가 스포츠에 자리 잡는 원인이 되었고, 그로 인한 폭력, 성폭력, 사생활 통제, 아동 학대, 학습권 박탈 등의 인권침해를 낳았다. 특히 결과에만 열광하는 스포츠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은 스포츠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인권문제들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했다. 세상이 변해 국민들도 ‘과정’을 주목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결과’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평등 정신을 구현한 파리올림픽
금녀(禁女)의 축제로 시작된 근대 올림픽은 이번 파리올림픽까지 128년이라는 세월을 달렸다. 파리올림픽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한다면 단연 남녀 참가자 비율을 1:1로 맞춘 것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비롯한 경기단체들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많은 종목에서 남녀 메달 수를 동일하게 맞추도록 노력했고, 혼성 경기를 늘려가는 등 성평등한 경기를 위해 스포츠의 오래된 질서를 바꾸었다.
거기에 더해 이마네 칼리프(알제리, 복싱), 린위팅(대만, 복싱)등 성적 소수자들의 출전을 통해 올림픽 헌장, 올림픽 이념의 기본원칙 제6조 “어떠한 종류의 차별 없이 향유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를 실천하고자 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스포츠계의 유리천장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여성 지도자는 10~20%대에 머물고 있고, 스포츠계 성주류화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는 대한체육회의 임원 중 여성은 19%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성별에 따른 임금 불평등, 일·가정의 양립, 재생산권 문제 등도 향후 반드시 풀어내야 할 과제다. 특히 올림픽 헌장과 같이 모든 성에 대한 평등을 지향해야 할 스포츠계의 인식은 단지 양성의 평등에만 머물러 있고, 뿌리 깊은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남아있다.
올림픽 시즌이 되면 전 세계의 선수들과 임원, 그리고 관광객들이 개최지를 방문한다. 개최국들은 좋은 모습만을 보이기 위해 도로와 건축물들을 정비하고, 국민들에게 주인의식을 불어넣으며 국민 모두가 손님맞이의 주체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런 올림픽의 ‘보여주기’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많은 부분에서 인권문제를 낳았다. 강제이주 문제가 대표적이다. 올림픽으로 인해 강제로 살던 곳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수백만 명에 이르는데, 1936년 베를린, 1964년 도쿄, 1984년 LA, 1988년 서울이 그랬다. 이뿐만이 아니다. 2008년 베이징에서는 무려 150만 명이 집을 떠나야 했다. 손님들이 보기에 다소 초라해 보였던 그들의 터전은 ‘환경 정화’라는 이름으로 개발업자들의 먹잇감이 되기 일쑤였고, 무허가 건물에서 이주대책조차도 없었던 사람들은 고속도로 뚝방 아래 땅굴로 들어가 숨죽여 있기도 했다. 이번 파리에서도 ‘정화’는 예외가 아니었다.
올림픽의 길: 바르게 걷기
이외에도 올림픽은 무분별한 경기장 건설로 인한 환경문제, 외국인 노동자들의 임금 불평등 문제,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인권침해, 다양한 문화권에 대한 몰이해, 안보를 위한 사생활 침해, 표현의 자유 침해 등 수많은 인권 이슈들을 낳고 있다. 문제의 원인은 올림픽이라는 축제의 기간 동안 ‘다름’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너무 쉽게 용인되고 있다는 데 있다. 올림픽 개최라는 공동체의 이익이 개인의 권리를 억압한다. 전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는 제전이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올림픽이 인류에게 주는 가치에 주목하면서 이 축제를 이어가고 있다. ‘스포츠 활동은 인간의 권리’라는 올림픽의 기본원칙과 같이 인권지향적 가치들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가 잠시 한눈을 팔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예민한 경쟁과 그에 부수적인 인권침해, 그리고 공정함의 뒤에 서서 버젓이 자행되는 차별과 혐오는 시간에 쫓겨 ‘다름’을 제거하는 전략을 취해 왔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올림픽 인권 이슈들에 대해, 언제나 올림픽 헌장을 비롯한 수많은 문건들을 통해 그런 방식은 “올림픽의 기본가치가 아니”라고 말해왔다. 올림픽 스스로 천명한 그 원칙 그대로 올림픽을 대하는 것이야말로 인권지향적 올림픽으로 ‘바르게’ 걸어가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글쓴이 김현수(체육시민연대 집행위원장)는 국가인권위원회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에서 스포츠계 인권침해 문제의 실태와 원인을 분석하고, 스포츠계의 잘못된 관행과 문화를 개선하고자 했다. 지금도 시민단체에서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
글 | 김현수(체육시민연대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