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0 > 지구인 이야기 >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한국의 고문방지 성적표

지구인 이야기 [2024.09~10]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한국의 고문방지 성적표

 

고문방지위원회 심의 중 휴식 시간
고문방지위원회 심의 중 휴식 시간

 

어두컴컴한 감옥, 찢어지는 듯한 비명. ‘고문’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장면이다. 기나긴 군부독재 시절 동안 대한민국도 인권옹호자들을 대상으로 고문을 자행하는 국가라는 오명을 벗기 어려웠다. 민주화가 이뤄졌다는 오늘날, 과연 우리나라는 고문 방지와 관련하여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성적표를 받았을까? 지난 7월 10일~1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 유엔 고문방지위원회의 심의가 개최되었다. 고문방지위원회는 한국 정부가 1995년 비준한 고문방지협약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를 정기적으로 심의하고 관련 권고를 내리는데, 이번 심의는 지난 2017년 심의 이후 7년 만에 열린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심의를 위해 사전에 독립보고서를 제출하는 한편, 심의 즈음 제네바 현지를 방문해 현장에서 한국의 고문방지협약 이행 상황을 알리는 활동을 펼쳤다.

 

고문방지협약의 정식 이름은 “고문 및 그 밖의 잔혹한, 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의 방지에 관한 협약”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문방지협약은 ‘전통적’ 의미의 고문뿐만이 아니라 모든 비인도적 처우나 처벌을 금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문방지위원회는 해당 국가의 감옥 내 인권상황뿐만 아니라 정신의료기관 비자의 입원, 법 집행관의 과도한 무력 사용, 북한이탈주민 구금시설, 군대 내 인권 침해, 가정폭력 및 성폭력, 인신매매, 이주노동자에 대한 폭력, 난민 신청자에 대한 인권 침해, 아동 체벌 등 다양한 사안을 검토한다. 고문 관련한 협약에서 무슨 그런 주제까지 다루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협약의 정식 이름을 살펴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한국 정부에 대한 이번 심의에서도 위와 같은 주제들이 여지없이 제기되었다. 고문방지위원회는 고문과 관련된 각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10명의 독립적인 위원들로 구성되는데, 이 중 두 사람이 한국 심의를 담당하는 국가보고관으로 지정된다. 이번 한국 심의를 담당한 국가보고관은 몰도바 출신의 아나 라쿠 위원과 덴마크 출신의 베델 케싱 위원이었다. 마침 베델 케싱 위원이 덴마크 인권위원회 출신이라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 같아 기대가 컸다.

 

유엔 고문방지위원회 심의가 열린 제네바 빨레 윌슨(Palais Wilson) 전경
유엔 고문방지위원회 심의가 열린 제네바 빨레 윌슨(Palais Wilson) 전경

 

본격적인 심의에 앞서 인권위는 국가보고관들과 별도 회의를 가졌다. 공식적으로 모든 위원에게 위원회 입장을 발표하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기는 했으나, 국가보고관들이 한국 보고서를 작성하는 담당자인 만큼 국가보고관들과의 면담 시간은 인권위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다. 국가보고관들은 인권위가 조사할 수 있는 구금·보호 시설의 범위와 권한, 활동의 독립성에 특히 관심을 갖고 많은 질문을 던졌다. 이틀에 나눠 진행되는 본 심의는 정부대표단의 기조발언과 위원들의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해 정부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이번에는 시민사회단체 대표의 일원으로 집단수용시설인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 손석주 대표와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박경인 공동대표가 함께 했는데, 피해 당사자가 제네바 현장에 와서 위원들에게 직접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을 공유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위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위원회에서 사전에 제안한 쟁점목록 이외의 새로운 사안에 대해서는 현장에서 질문이 나오기가 쉽지 않은데, 피해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활동 덕분에 탈시설 및 과거사 문제가 심의 당시 제기되기도 했다.

 

양일간의 고문방지위원회 심의 결과는 한 달여가 지난 7월 26일, 고문방지위원회 홈페이지에 공개되었다. 구금시설 과밀수용 개선, 사형제 폐지, 국가보안법 개선 또는 폐지, 군형법 92조의6 폐지와 같이 다른 국제인권조약기구에서 권고한 사항이 동일하게 반복되기도 했으나, 고문방지위원회에서 시설수용 및 과거사 피해자의 구제를 보장하라는 권고가 내려진 것은 처음이라 고무적이기도 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관련해서는 독립성 및 자율성을 보장하고, 위원 선출 및 임명 절차를 투명하게 하며, 모든 구금 장소를 불시에 방문해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라는 권고가 내려졌다. 특히 △피구금자에 대한 기본적 법적 보호 장치 보장, △구금시설 독방 금치 관행 및 법제 개선, △구금시설 수용자에 대한 적절한 의료서비스 제공, △군대 내 학대, 사망에 대한 독립적 조사 및 책임자 처벌 관련 권고는 우선순위 권고로 선정하고 한국 정부에게 1년 이내에 후속조치를 회신할 것을 요청했다.

 

“고문이라 함은 공무원이나 그 밖의 공무 수행자가 직접 또는 이러한 자의 교사·동의·묵인 아래, 어떤 개인이나 제3자로부터 정보나 자백을 얻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개인이나 제3자가 실행하였거나 실행한 혐의가 있는 행위에 대하여 처벌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인이나 제3자를 협박·강요할 목적으로, 또는 모든 종류의 차별에 기초한 이유로, 개인에게 고의로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말한다.”

 

고문방지협약 1조에 나오는 고문의 정의다. 국제사회에서 고문의 정의가 확대되는 만큼 정부의 책임과 역할도 커지고 있다. 내년은 한국이 고문방지협약을 비준한 지 딱 30년이 되는 해다. 긴 시간 동안 분명히 개선되는 점도 있었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상황, 심지어 악화되고 있는 상황도 존재한다. 심의는 끝났지만 받은 권고를 성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정부, 국회, 인권위, 시민사회단체 모두가 협력해 나가야 할 것이다. 국제인권기준의 성실한 국내 이행을 통해 향후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더 큰 인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글 | 백가윤(국가인권위원회 국제인권과)

이전 목록 다음 목록

다른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