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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는 시간 [2024.09~10]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라라걸>

 

2024 파리 올림픽은 성평등 올림픽을 표방했다. 우선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남녀 선수의 비율이 5250명 대 5250명으로 동수를 이뤘다.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성비 균형을 위해 여성 선수들의 출전 종목과 혼성 종목을 늘린 결과다. 최초의 근대 올림픽인 1896년 아테네 올림픽은 여성 선수들 없이 치러졌다.

 

라라걸

 

여성의 올림픽 참여는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 때부터였고, 여성 선수의 참가 비율은 2.2%에서 시작해 2021년 도쿄 올림픽 때 47.8%를 찍고 올해 마침내 50%를 기록했다. 개막식에선 프랑스 역사가 기념해야 마땅할 10명의 페미니스트들의 동상을 제작해 공개했다. ‘여성이 단두대에 올라 처형당할 권리가 있다면 연단에서 발언할 권리도 있다’는 명언을 남겼으며 프랑스 혁명 시기 여성의 참정권 등을 주장한 올랭프 드 구주를 비롯해 세계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인 알리스 기, 프랑스 임신중지 합법화의 주역인 정치인 시몬 베유 등이 포함됐다. 또한 올림픽의 대미를 장식하는 엔딩 종목을 기존의 남자 마라톤에서 여자 마라톤으로 바꾸었고, 올림픽 공식 방송 서비스(OBS)는 여성 선수들의 경기를 더 많이 중계하고 카메라가 여성의 신체를 불필요하게 부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등의 지침을 내렸다. 간혹 “여자 선수 치고는 oo하다” 같은 아쉬운 중계방송 멘트도 들었지만, 남녀 동수 출전을 이룬 이번 파리 올림픽의 성과는 고무적이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너무도 유명한 올림픽의 모토가 한때 여성들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서건 이를 꿈꾼 여성들이 있었다. 더 빠르게 달리고, 더 높이 오르고, 더 힘차게, 더 먼 곳으로 나아가고 싶은 사람들,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자 하는 여성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었다. 영화 <라라걸>의 미셸 페인도 그런 여성 중 한명이다. 미셸 페인은 세계 최고의 경마 대회 중 하나인 ‘멜버른 컵’에서 최초로 우승한 여성 기수다.

 

라라걸

 

<라라걸>은 호주 경마의 역사에서 유의미한 족적을 남긴 여성 기수인 미셸 페인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미셸 페인의 소개에 사족처럼 여성이라는 성별을 덧붙인 이유는 경마/승마라는 종목의 특성 때문이다. 여자 축구/남자 축구처럼 대부분의 스포츠는 여자부와 남자부가 나뉘어 승부를 겨룬다. 경마와 승마는 다르다. 올림픽에서 유일하게 남녀가 함께 경쟁하는 종목이 승마다. 경마 대회에서도 남녀 기수가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을 펼친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여성 기수는 소수이며, 그들은 오로지 실력으로 공고한 유리천장을 깨부수며 전진해왔다.

 

라라걸

 

1861년부터 역사를 이어온 멜버른 컵은 호주에서 말을 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출전을 꿈꾸는 유서 깊은 경마 대회다. 경마 산업에 종사하는 집안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자라 마구간을 내방처럼 드나드는 미셸(테레사 팔머)의 꿈도 멜버른 컵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셸이 참가하기 전까지, 155년 역사상 멜버른 컵의 여성 참가자는 단 4명뿐이었다. 멜버른 컵 우승마와 기수의 이름을 줄줄 외우는 미셸의 꿈은 일찍이 확고했지만, 사람들은 이 어린 소녀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자는 멜버른 컵에 못 나가.” 미셸의 스승이자 든든한 지원군인 아빠 패디(샘 닐) 역시 멜버른 컵에는 남자 기수가 나가야 한다고 여긴다. 미셸에겐 기수로 활약 중인 언니와 오빠들이 있다. 어린 미셸의 눈에도 그랬고 실제 성적도 그랬고, 기수로서 재능과 야망을 지닌 건 패트릭 오빠가 아닌 브리짓 언니였지만 아빠는 자식들 중 멜버른 컵에서 우승할 재목은 패트릭이라며 아들을 격려한다. 딸의 꿈을 지원하지 않는 이유가 경마가 위험한 스포츠여서라면, 이것은 딸에 대한 과잉보호인가 아들의 능력에 대한 과신인가.

 

언니1
(설거지를 하며) 틈을 치고 나가지 않으면
겁쟁이라고 하지, 여자라서.


오빠1
모든 건 결국 힘이야.

언니2
중요한 건 힘이 아니라 포지션이야.

언니1
(여전히 설거지를 하며) 그런데 틈을 치고 나가서
지면 충동적이고 기술력이 없다고 하지. 여자라서.

 

라라걸

 

패디네 남매들이 집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여성 기수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정확히 옮긴 것이다. 여성 기수는 힘이 부족하고 충동적이라 우승할 수 없다는 편견. 그럼에도 미셸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미셸이 걸어가야 할 길이 비포장도로임은 말할 것도 없다.

 

여성 기수를 기용하려는 마주들이 없어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것은 물론이고, 어렵게 기회를 잡아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심각한 낙마 사고를 당해 다시는 말을 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태에 마주한다. 3200번의 대회 출전 중 361번의 우승, 7번의 낙마와 16번의 골절이라는 미셸의 기록은 경마가 얼마나 위험한 스포츠인가를 말해주지만 부상조차 미셸을 멈춰 세우지는 못한다. 운명적으로 자신과 닮은 말 ‘프린스’를 만난 미셸은 멜버른 컵에서의 우승을 다시 한번 꿈꾸지만, 이번엔 여성 기수에 대한 마주들의 불신이 미셸과 프린스를 갈라놓으려 한다. 경마산업 종사자 대부분은 남자다. 그들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 “여기수는 멜버른 컵 우승 근처에도 못 가봤어요.” “멜버른은 어려운 대회예요. 힘이 필요하죠.” 2015년, 우여곡절 끝에 미셸은 프린스와 함께 멜버른 컵에 출전한다. 24명의 기수 중 유일한 여성 기수였으며, 멜버른 컵 대회 사상 5번째 여성 기수였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결승선을 통과한다. (실화가 스포일러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선 실제 미셸 페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대회 우승 직후 가진 인터뷰 영상에서 그는 밝게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힘이 부족해서 우승하기 힘들다고 했는데, 방금 우리가 세상을 이겼네요.” 더 높은 곳으로 더 먼 곳으로 더 빠르고 힘차게 달리고자 하는 여성들을 어떻게 세상이 막을 수 있을까! 사실 영화는, 현실에 만연한 부당한 차별의 일부만 담았다고 해도 될 만큼 순한맛의 연출을 보여주는데, 멋지게 세상을 이긴 뒤 지어 보이는 미셸 페인의 환한 미소 만큼은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참고로 영화의 원제는 ‘Ride like a girl’이다. 소녀답게 타라는 건, 그저 자신답게 타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훌륭한 기수가 되길 꿈꾸는 소녀들은 미셸 페인과 같은 여성 운동 선수들, 벽을 허문 최초의 여성들을 보며 이 세상에 여자라서 안 되는 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라라걸>은 그렇게 우리들의 꿈을 응원한다.

 

 

글쓴이 이주현은 전<씨네21> 기자이자 편집장이다. 인권 영화 도서 「총은 총을 부르고 꽃은 꽃을 부르고.」를 썼다.

 

글 | 이주현(전 씨네21 편집장

사진 | 네이버 영화, ⓒAFC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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