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0 > 세상,바로미터 >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

세상,바로미터 [2024.09~10]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

 

2021년, 세상에 내놓은 책 제목입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발생한 교제살인 사건 판결문 108건을 일일이 찾아내 분석해 보도했고, 이를 모아 책으로 발간했습니다. 그렇게 분석한 108건 중 30건(27.8%)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교제중단을 요구했던 정황이 나타났습니다. 단지, 헤어지자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관계를 끝내고 싶어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가해자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피해자는 끝내 사망했습니다.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
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
이주연, 이정환 (지은이), 오마이북

 

 

‘데이트폭력’이라는 말로는
이 고통과 죽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교제살인’이며 사회적으로
막아내야 하는 죽음이다

 

지난 3월 경기도 화성에서 발생한 교제살인 사건이 그랬습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살해했고, 가해자가 휘두른 칼로 인해 피해자의 어머니도 크게 상해를 입었습니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살해 현장에서 가해자가 “내 것이 안 되면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가해자와 함께 살던 피해자는 어머니와 함께 짐을 빼러 갔던 길이었습니다. 지난 4월 경남 거제에서 발생한 교제살인 사건도 그러했습니다. 피해자는 헤어지자고 했고, 가해자는 주거지로 찾아와 자고 있던 피해자를 무차별 폭행했습니다. 피해자는 결국 사망했습니다. 지난 5월 서울 강남 건물 옥상에서 벌어진 교제살인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피해자는 헤어지자고 했고, 가해자는 흉기로 피해자를 찔러 살해했습니다. 지난 6월 경기도 하남에서 발생한 사건도 결별 통보를 이유로 가해자가 피해자를 살해했습니다. 헤어지자고 했을 뿐인데 여성이 사망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는 것에 대해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친밀한 관계 살인의 경우 ‘결별’ 이후에 피해자가 살해당하는 특징을 보인다”라며 “상대를 동등한 주체로 인식하기 보다는 소유물, 통제와 조종의 대상으로 여기는 가해자의 특성은 그와 같은 통제를 ‘거절’하는 시도인 ‘결별’ 과정에서 피해자가 살해당할 수 있다”(‘거절 살인’, 친밀한 관계 폭력 규율에 실패해 온 이유, 2024년 6월 국회 입법조사처)고 진단하기도 했습니다.

 

교제살인
사진=제 10회 인권보도 본상을 수상한 <오마이뉴스> 특별기획 "교제살인"
[출처] - 오마이뉴스 [원본링크]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22878&CMPT_CD=SEARCH

 

사실, ‘교제살인’이라고 부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첫 보도가 나간 2020년에만 해도 사귀는 사이에서 발생한 폭력을 ‘데이트폭력’이라 불렀습니다. 가장 친밀했던 남자친구에게 맞아 죽고 찔려 죽고 목 졸려 죽어간 사건을 목도한 우리는 이 참혹한 죽음에서 ‘데이트’라는 단어를 걷어내기로 했습니다. 핑크빛 단어로는 이 죽음을 결코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사귀다가 상대를 죽인 사건’을 두고 ‘교제살인’이라 명명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4년이 흐른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사건들을 ‘교제살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명칭은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여성들은 헤어지자고 했을 뿐인데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술을 그만 마시라고 했다고, 술에 취했다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돈을 아껴 쓰라고 했다고, 또는 돈을 아껴 쓰지 않는다고 죽을 때까지 얻어맞았습니다. 다른 남성에게 양파를 줬다가 사망한 여성도 있었습니다. 의심 또는 집착을 사람까지 죽일 수 있는 격분의 이유로 내세우며 자신을 변호하는 가해 남성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교제살인으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잃고 있는지 정부의 공식 통계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여성가족부와 경찰은 법적으로 ‘교제관계’, ‘친밀한 관계’에 대한 정의가 없다는 이유로 임의로 통계를 관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교제폭력에 따른 구속률도 매우 낮습니다. 경찰청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올 1월부터 4월까지 교제폭력으로 신고된 건수는 2만 5967건에 달합니다. 이 중 검거된 가해자는 4395명, 이 가운데 구속된 사람은 82명에 그쳤습니다. 구속률이 1.87%에 불과합니다. 경찰은 ‘피해자가 처벌 불원 의사를 밝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교제폭력은 반의사불벌죄, 즉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처벌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피해자가 신고를 했어도, 처벌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가해자는 풀려나고 맙니다.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

 

<오마이뉴스>가 판결문을 분석한 108건의 교제살인 사건 가운데 6건에도 피해자가 ‘처벌불원 의사를 밝혔다’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수사기관이나 법정에서 처벌불원 의사를 밝혔다가 동일 가해자에게 살해된 피해여성이 6명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처벌불원 의사를 전한 시점에, 피해자는 가해자와 함께 지내고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와 친한지, 내 직장이 어디인지, 내가 언제 집에 오는지 등 개인 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가해자가 심지어 일상을 함께 하는 사람인 상황. 피해자는 보복이 무서워, ‘벗어날 수 없다’ 체념하고 말았던 게 아닐까요.

 

사진=거제 교제살인사건 가해자 재판이 열린 11일 오후 여성의당 경남도당, 경남여성회 등 단체들이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앞에서 입장을 밝혔다.
사진=거제 교제살인사건 가해자 재판이 열린 11일 오후 여성의당 경남도당, 경남여성회 등 단체들이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앞에서 입장을 밝혔다.
[출처] - 오마이뉴스 [원본링크]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45465&CMPT_CD=SEARCH

 

별도의 교제폭력 처벌법 제정 등을 통해 교제폭력의 경우 반의사불벌죄에 적용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언론·여성계 안팎의 요구가 이어졌지만, 2024년 8월 현재까지도 법 통과는 요원합니다. 교제폭력은 단순히 남녀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앞서 ‘헤어지자고 했을 뿐이었는데’ 사망한 사건들처럼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여성을 속박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명백한 살인의 전조 양상을 띕니다. 법으로 교제폭력·교제살인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처벌하겠다는 뜻을 국가·국회가 이미 오래 전에 밝혔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21대 국회에서 교제폭력처벌법을 통과시켰더라면, 지금 제 딸은 제 옆에 있지 않았을까요.” 지난 7월 5일, 거제 교제살인 사건의 피해자 이효정씨 어머니는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말처럼, 국회의 직무유기를 짚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데이트폭력 처벌법은 2016년 2월 첫 발의됐습니다. 8년 6개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국회는 무엇을 했나요. 21대 국회에서 가장 많은 여성 의원이 선출됐고 최초의 여성 부의장도 선출됐습니다. 그럼에도 관련 법 하나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교제살인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실행에 옮겨야 할 책임은 국가에 있습니다. 여성폭력 실태부터 ‘공식 통계’로 집계해 참혹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더이상 교제살인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단 한 명의 여성도 더는 교제살인으로 죽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회가, 국가가 지금 나서야 합니다.

 

1) 에듀프레스(2024.4.30.) “교사 1500명 학생인권조례 폐지 규탄. 우리가 원한 건 교육의 회복”
http://www.edupress.kr/news/articleView.html?idxno=11652
2) 한겨례(2024.5.10.) “학생인권조례 폐지하자마자... 복장두발 단속 꿈틀댄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1139988.html

 

글 | 이주연(오마이뉴스 기자)

이전 목록 다음 목록

다른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