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인을 만나다 [2024.07~08] 행동하는 노년의 기후진정
진정인 이정희씨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지난 3월, 무려 123명의 진정인이 인권위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들을 대표해 기후단체 ‘60+ 기후행동’에서 일하고 있는 이정희 운영위원을 만났습니다.
산 아랫마을에 혼자 거주하는 77세 A씨는 수년째 지속되는 폭우와 폭설로 산사태에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고혈압을 앓고 있는 89세 B씨는 기후위기에 따른 온도변화로 심혈관 질환이 악화될까 두렵다. 농사를 짓는 65세 C씨의 마을은 몇 년 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될 만큼 위력적이었던 폭우로 주거와 일상에 큰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적지 않은 노인들이 기후재난으로 생명과 신체의 위협에 상시로 노출되어 있다.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신체적 능력은 점점 떨어지고, 사별 등의 이유로 사회적 관계도 약해져 가는 상황에서 기후재난의 영향은 더욱 커진다. 노년의 삶에서 기후위기는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일까? 평균 연령 63세의 진정인 123명은 노인의 생명권 보장을 위한 ‘기후 진정’에 나섰다. 기후변화가 고령자인 진정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존엄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할 적극적 의무가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기후위기와 세대 간 불평등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기후변화의 장기적 악영향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는 미래세대는 기성세대의 무관심이 자신들의 생명권과 행복추구권을 빼앗았다고 비판한다. 기후위기 헌법소원 2차 공개변론이 열렸던 5월 21일, 소송에 참여한 한제아 양은 “세상은 우리에게 어린이답게 행동하라고 요구하면서 기후위기 해결과 같은 중요한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와 같은 엄청난 문제를 우리에게 해결하라고 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기후진정도 같은 고민을 담고 있다. 이들은 기후위기 대응에 취약한 노년층의 생명권과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질적인 목표는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과거세대의 책임을 미래세대의 부담으로 남기지 않기 위해, 노년층이 먼저 변화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진 노년은 이렇게 행동을 개시했다.
변한다는 것은 나이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다. 새로운 도전에 필요한 체력적 소모도 크고, 여기저기 아픈 곳도 늘어난다.
오랜 시간 쌓인 개인의 경험과 지식이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기후진정에 함께한 사람들은 달랐다. 자신이 누려온 물질적 풍요가 청년들의 미래를 빼앗아 온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고,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 적극적인 변화를 결심한 것이다.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직접 사회에 이바지하는 ‘신노년’이 되기 위해 각자 가진 유·무형의 자산을 활용해 “노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고 외친다. 청년 기후 활동가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뒷배’가 되기 위해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사회적 상속의 방법을 고민하며, 탄소배출을 줄이는 재생농업을 배운다. 공유주방에 함께 모여 저탄소 식단을 요리하고, ‘어슬렁 행동’으로 기후 시위 현장에 참여한다. “두세 명이 열을 지어서 시위가 있는 공간을 왔다 갔다가 하며 시민들에게 알리는 방식이에요. 때로는 발언이나 구호도 외치고요. 청년들과 같은 방식으로는 행동을 지속하기 어려우니, 우리 나이에 맞는 방식을 찾은 거죠.” 이제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모르는 이는 없다. 많은 이가 일회용품 대신 텀블러와 에코백을 선택하고 일상의 작은 실천을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정희씨에게 「인권」독자를 비롯한 시민들이 함께할 수 있는 기후위기 대응 방안에 무엇이 있을지 물었다. “기후 유권자가 되라고 권하고 싶어요. 법과 정책의 실질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기후위기에 진심으로 대처할 수 있는 후보나 정당에 관심 두는 것이 중요해요.” 평균 연령 63세의 ‘어르신’들이 자신의 삶을 먼저 바꿔야 한다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도, 정부도 더 늦기 전에 적극적으로 변해야 한다. 이제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60+기후행동 및 기후솔루션의 '노년층 인권위 기후진정 후속 기자간담회'
인권위 조사 결과, 노년의 기후진정 사건은 각하됐다. 진정요지와 관련한 피해 사례가 특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다. 대신 진정인들은 사건을 정책 부서로 이송하여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앞으로 인권위의 정책검토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이정희씨는 이같이 당부했다. “인권위가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시민들과 협력해서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는 일에 더 적극적이기를 바라요.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 상황이 발생하면 인권위가 직접 현장에 나가 조사하는 것도 필요하고요. 현재 진행형인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나 국회에 대한 정책권고를 지속하면서 법적, 제도적 대안을 만들 수 있도록 감시하는 활동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기후변화로 인한 당면한 위기 앞에서, 인권위도 현재세대와 미래세대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역할을 다할 것이다. 인권위가 가까운 시일 내에 이정희씨를 비롯한 123명 진정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글 | 박정현(국가인권위원회 홍보협력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