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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보기 [2024.07~08] #1 노년기, 자기결정권과 의사결정 지원

 

자녀에게는 옹고집, 본인에게는 주체성과 자기결정
노년의 선택을 이해하고 지지하려면?

 

80대 후반의 친정어머니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본인 의사가 확실하다. “나는 아무 데도 안 간다. 여서 죽을끼다. 내 집이 최고다.” 거의 와상 상태인 아버지의 삼시 세끼를 준비해야 하기에, “그럼 집으로 오는 요양보호사라도 부르자”라는 자식들의 제안에 “내가 혼자 다 할 수 있는데, 뭐할라꼬.” 역정을 낸다. 파킨슨병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오랜만에 온 딸의 밥상을 차리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노년기, 자기결정권과 의사결정 지원

 

점점 보폭이 좁아지지만, 실버카트(노인의 보행을 돕는 바퀴 달린 보행기)를 밀고서라도 동네에서 제일 싸게 파는 가게까지 가서 장을 보고 온다. 지난해 무릎 수술해 드린다고 수백만 원을 쓴 아들이 “제발 돌아다니지 말라”고 버럭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다. 듣지도 못하니 말이다. 본인에게는 주체성이지만 자식들에게는 옹고집이 아닐 수 없다. 내 주변에도 적지 않은 자녀들이 부모님의 ‘고집’ 때문에 마음이 조마조마하다고 한다. ‘90대인데도 운전대를 놓지 않으려 한다.’, ‘당뇨가 있는데도 식구들 몰래 막걸리를 마신다.’, ‘아무리 말려도 폐지를 주우러 다닌다.’ 등의 고민거리를 듣다 보면 노인은 고집이 세고,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며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고정관념이 아예 편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는 이런 고집 세고 제멋대로인 친정엄마를 보면서, “아, 저 나이에도 사는 게 제법 재미있겠는데”라고, 생각하게 된다. 귀가 어두운 어머니는 TV 화면을 보면서 혼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모두 알고 싶어하고 그만큼 얘깃거리도 많다. 자식들에게 외롭다, 자주 와라 등의 말도 그다지 하지 않는다. 주체적인 만큼 더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삶의 의미도 풍부한 것 같다. 사실, 노인들의 옹고집은 점점 불편해지는 몸과 의존하려는 마음에 지지 않으려는 자기와의 싸움이 아닐까.

 

몇 년 전부터 장기 요양 서비스 현장에서 치매와 장애가 있는 노인을 위한 ‘사람중심케어’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모임을 만들어서 함께 공부하고, 현장에서의 실천을 지원한다. 사람중심케어의 기본적인 사상은 치매와 장애가 있더라도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다움을 잃지 않으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사자 관점에서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중심케어의 창시자인 영국의 톰 킷우드(Tom Kitwood)는 치매 노인의 ‘사람다움’을 ‘편안함, 애착, 정체성, 주체성, 포함’이라는 5가지 심리적 욕구를 중심으로 설명한 바 있다. 필자는 몇 년 전, 톰 킷우드와 그의 동료들이 만든 척도로 국내 장기 요양시설에서의 사람중심케어 실천 정도를 살펴본 적이 있다. 전국의 다양한 장기 요양기관들을 대상으로 조사하는 동안, 좋은 돌봄 모델들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주체성’의 지지가 부족한 점이 아쉬웠다.

 

 

주체성이란
‘삶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
내 주변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으며
자신을 유용한 존재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을 말한다(Boyle, 2014).
자기 삶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자율과 자기결정이 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국내의 장기 요양시설은 어떠한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정해진 시간에 똑같이 식사하고 목욕을 한다.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혼자 식사하는 어르신의 숟가락을 빼앗아서 먹여드리거나 낙상이 걱정되어 기저귀를 채운다. 학대를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잠자고 휴식하는 공간에 CCTV를 설치한다. 이렇게 국내 요양시설에서 치매 노인은 보호되고, 통제되며, 관리되는 대상이 된다. 치매로 진단을 받는 순간 노인의 자기 결정권은 크게 제한받는다. 치매라는 질환에 ‘치료 불가능, 무능, 할 수 없음, 의존’이라는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살고 싶은지, 어떤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어떤 돌봄을 받고 싶은지에 대해 누구도 물어보지 않는다. 치매라는 꼬리표가 달리는 순간, 사람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잔존역량과 삶의 경험을 무시한다. 치매 노인과 건 강한 우리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지고, 한 사람의 고유성은 사라진다. 그렇게 치매 노인은 일찌감치 삶에서 하차하는 방관자가 되고, 알록달록한 색깔을 가진 고유한 삶은 사라진다. 그 결과, 인지는 더욱 나빠지고 계획하고 실행하는 능력은 도태되면서 중증 치매 노인으로 빠르게 퇴행한다.

 

선택권을 갖는다는 것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며, 선택권은 인권의 기초가 된다. 모든 인간에게는 주체성과 자율성이 존재한다. 자율성(autonomy)이라는 용어는 자아를 뜻하는 그리스어 ‘autos’와 법을 뜻하는 ‘nomos’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에서 법을 제정할 때 시민들이 참여했던 것에서 ‘자율성’의 개념이 만들어졌다. 개인 자율성의 출현은 좀 더 최근의 현상으로, 칸트 철학에 기인한다. 칸트는 자율성을 자유 의지의 개념에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에만 충실한 자유 선택을 옹호한 것은 아니다. 개인의 욕망이 아닌 의무와 이성에 의해 뒷받침되는 삶의 방식을 ‘자율성’이라고 이해했다. 영국의 철학자인 밀(John Stuart Mill) 역시 개인의 자유와 선택 의지를 강조했지만, 자신의 자율적 선택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했다(Greaney, O’Mathúna, 2017). 자율성이란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거나 사회적 규범이나 관계에서 벗어난 자유가 아니라 상호의존적 관계를 토대로 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노인이 혼자 자기 집에서 더 이상 살기 힘든 상태가 됐을 때, 시설로 옮기지 않겠다는 자기결정이 무조건 존중되기는 어렵다. 스스로 식사 준비를 하지 못하더라도, 도시락 배달 등으로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누군가가 가져다준 식사를 혼자서 차려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요양시설로 옮기는 것을 결정해야 한다. 다만 그 선택이 자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스스로 요양시설 입소를 결정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노년의 자율성을 지지하는 방식이다. 운전도 마찬가지이다. 사고 가능성을 설명하고, 대신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을 제시함으로써 신체적 상황에 맞게 운전면허증 반납을 결정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율성과 자기 선택은 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 실현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바로 자기다운 결정이 가능해진다. 노인이 되면 예전에 비해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진다. 따라서 노인의 주체성은 ‘상실’을 전제로 하며 마지막 단계에서는 위임되는 특징이 있다.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생애 마지막 단계에 오히려 중요한 결정들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치료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장례는 어떻게 치를 것인지 등은 그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결정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가까운 가족이 있을 때는 위임과 대리 결정이 비교적 쉽다. 그 사람의 선호와 가치, 삶의 역사를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 사는 노인이 늘어나는 만큼 그들의 의사를 어떻게 추정하고 지원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다. 우리 사회는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고 ‘혼자 살다, 혼자 아프고, 혼자 죽는’ 1인 가구의 시대로 변화하고 있다. 장애와 치매가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 타인의 결정을 일률적으로 대신해도 되는 것일까? 성년후견인 제도는 당사자의 의사를 대리하는 데 충분한 제도인가? 노년의 삶에서 주체성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 역시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할 듯하다.

 

참고문헌 Boyle, G. (2014). Recognising the agency of people with dementia. Disability & Society, 29(7), 1130-1144. Greaney, AM., O’Mathúna, D.P. (2017). Patient Autonomy in Nursing and Healthcare Contexts. In: Scott, P. (eds) Key Concepts and Issues in Nursing Ethics. Springer, Cham.

 

글쓴이 김동선 (조인케어 대표/숙명여대 실버비즈니스학과 초빙 대우교수). 한국일보 기자로 일했으며, 초고령국가 일본에서 공부한 뒤 노인 문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야마토마치에서 만난 노인들' '마흔이 되기 전에 준비해야 할 노후대책 7' '치매와 함께 떠나는 여행(번역)' '노후 파산 시대, 장수의 공포가 온다(공저).' 등을 썼으며 최근에는 치매케어, 돌봄 기술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사람중심케어(PCC)실천네트워크를 통해 요양 서비스문화를 바꾸는 데에도 열심이다.

 

글 | 김동선(사람중심 케어 실천 네트워크, 조인케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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