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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톺아보기 [2024.07~08] 노년의 인권 어떻게 볼 것인가

 

노년기에 신체기능 또는 인지능력이 쇠약해지면, 자신의 일상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인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2023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출간한 책 ‘노년기, 자기결정권’은 자기결정권의 개념, 노년기 자기결정권이 문제가 되는 상황을 이론적으로 다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노년의 자기결정권 문제가 어떻게 경험되고 이해되는지에 대해서는 잘 다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노년에 대한 연구와 글쓰기를 오랫동안 해오신 정진웅 전 덕성여자대학교 교수님과 최현숙 작가님을 만나보았습니다.

 

왼쪽부터 최현숙 작가, 전 덕성여자대학교 정진웅 교수
왼쪽부터 최현숙 작가, 전 덕성여자대학교 정진웅 교수

 

사회자  생애주기 관점에서 보면 아동기에서 성인으로 발달하는 과정은 자율성과 독립성이 확대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노년기에는 자율성과 독립성이 급격하게 축소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자기결정권에 대한 경험이 잘 드러나지 않다 보니, 인권 문제로 조명을 받지 않는 듯해요.

 

최현숙  인생의 말년기에 산업사회에서 IT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급격한 변화를 겪는 지금의 노인들은 적응이 힘든 상황이에요. 이전 세대의 노인들과는 다르죠. 과거에는 환경 변화가 크지 않다 보니 노인의 경험과 지혜가 필요했어요. 그런데 산업사회이자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노인은 효율성 낮고 무력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노인의 자기결정권을 포함한 인권이 쉽게 무시되는 거죠.

 

정진웅  예를 들어, 키오스크를 사용할 수 없으면 무언가 사거나, 이용할 결정 자체가 불가능한 거잖아요. 환경적으로 나의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줄어든 거예요. 디지털 리터러시가 없으면 나의 선택과 결정이 제약되는 오늘날의 상황은 노년의 자기결정권을 축소하는 중요한 환경적요인이 돼요.

 

최현숙  제가 좀 더 심각하게 생각했던 건 스마트폰으로 기차표를 구매하는 것이었어요. 노인들이 명절 때 자식과 손주들을 보기 위해 줄을 서도 기차표를 구매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는 것은 사회가 애초부터 노인들이 어떤 욕구를 갖거나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막고 있는 거라고 느껴져요.

 

 

사회자  돌봄 및 요양 환경에서 자기결정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는데요. 요양원 입소를 생각해보세요. 겉으로는 노년들이 입소를 결정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원치 않았음에도 입소를 결정하거나, 아니면 자식들이 부모의 입소를 결정하잖아요.

 

최현숙  요즘 노인들이 가장 흔하게 하는 말이 “절대 요양원 들어가지 말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돈이 많은 노인들을 제외하고, 요양원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다들 생각해요. 일종의 포기인 거죠. 노인이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요, 대체로 건강할 때는 경로당, 복지관 같은 곳을 다니면서 친구들도 만나고 잘 지내요. 그러다 아프기 시작하면 자식들이 부모를 병원에 모시고 가요. 그런데 노인의 건강이 좋아지는 게 쉽겠어요? 이제 죽음으로 가시는 마당이니 자식들은 요양병원, 요양원으로 부모를 모시는 거예요. 이 과정에서 부모의 동네 친구들이나 사회 관계에 대한 고민이나 배려없이 노인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거예요. 그때부터 노인은 정말 철저한 소외나 배제를 경험하게 되는데, 사회 관계에서 뿌리 뽑힌 느낌인 거죠. 특히 노인에게는 익숙함이 굉장히 중요한데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다 익숙하지 않은 관계들까지 겪으면서 없던 인지장애도 생기고, 더 불행해지고 건강도 빠르게 악화되는 거죠.

 

정진웅  요양원으로 가는 결정의 단계에서, 자녀들이 부모를 집에서 모시면서 돌보다가 힘겨우면 요양원 입소 결정으로 넘어가게 되는 거죠. 이는 노년을 돌보는 자녀 세대의 자기결정권 문제이기도 해요. 노년 돌봄으로 인해 자녀들도 자신들의 시간을 자유롭게 쓰거나 직장을 계속 다니려는 결정이 침해된다고 느끼게 되죠. 자녀 입장에서는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어려운 일이에요. 노년기에 어디에서 살 건지, 병원에 들어가고 싶은지 아닌지 하는 노년의 자기결정권이라는 것이 노년을 돌보는 자녀 세대의 자기결정권과 충돌하는 거예요. 서로의 자기결정권이 존중되고 양립 가능해야 되는데, 부모의 건강이 약해져 돌봄이 필요해지면 이렇게 세대 간의 자기결정권이 충돌하는 계기가 생기고, 그럴 때 요양원에 가느냐 안 가느냐의 결정 문제가 이런 충돌이 표현되는 지점이겠죠.

돈이 있으면 돌봄 노동자를 고용하겠죠. 그러나 돌봄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노년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게 돼요. 사실 건강에 취약해진 노년 돌봄의 문제가 핵가족 혹은 직계가족으로 표현되는 가족의 테두리 내에서 해결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문제, 그래서 가족 돌봄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이 사회적 시스템이 세대 간의 충돌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좀 확실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요. 결국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틀이 아니라 노년 돌봄을 어떻게 사회화할 것인가 하는 것을 논의해야 하고, 현실에서의 변화도 촉구할 필요가 있어요.

 

 

사회자  돌봄과 요양 문제 이외에 노년의 자기결정권을 제약하는 인식과 문화도 짚어봐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아는 분은 이제 60세인데 혼자 자전거로 인천에서 원주까지 갈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가족들이 ‘다치면 어떻게 하냐’면서 반대했다고 해요. 아무리 노년기가 기능이 쇠퇴하는 시기라고 해도,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스스로 깨달으면서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 아닐까요?

 

최현숙  제가 아는 해남의 한 할머니 이야기인데요. 이 양반이 암에 걸렸었고 사고도 났었고 수술도 했어요. 병원에서 퇴원하고 한참 지나니까 할머니가 다시 스쿠터를 타고 논길을 부릉부릉 달린 거예요. 할머니를 본 보건소장이 그러다 사고 나면 어떡할 거냐고 걱정을 했대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내가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냐’고 되받아쳤다고 해요. 그게 할머니든 누구든 간에, 하고 싶은 거 하다가 죽겠다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아까 돌봄의 사회화 얘기를 했는데, 그 사회화라는 게 국가의 정책이나 제도들이 있지만, 동네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개입할지, 노인의 구체적인 욕구를 인권 차원에서 어떻게 실현할지에 대해 계속 논의하고 실험해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회자  노년과 관계하는 주변 사람들부터 국가 정책까지 노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노년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존중해주고 지지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년이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이성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에요. 영화 <디어 마이 러브>를 보면 삶의 의지라곤 없는 늙은 아버지가 딸이 보낸 가사도우미와 사랑에 빠져요. 그런데 딸은 이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해 갈등이 생겨요. 결국, 아버지는 건강에 문제가 생겼고 딸은 아버지와 가사도우미와의 사이를 떼어놓죠. 그러다 두 사람이 재회하게 되는데, 아버지는 가사도우미에게 청혼을 하고 죽음을 맞아요. 살아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한 영화였어요.

 

최현숙  어느 50대 며느리가 해준 이야기예요. 혼자 사시던 시어머니가 어느 날 연애를 시작한 거예요. 며느리는 ‘어머니가 결혼하게 되면 그나마 하나 있는 집까지도 우리한테 물려주지 못하는 거 아니냐’하는 걱정을 했대요. 그러자 그 시어머니가 “내가 이 나이에 뭐 하러 결혼을 하겠냐, 연애만 할 거니 걱정 말아라”라고 했대요. 혼자가 된 노인의 경우에는 사람을 사귀고 싶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죠. 그런데 현실 속에서 이 문제가 단순하지 않아요. 굉장히 사회적인 문제이죠. 이것을 노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이라고 보고 사회적으로 의제화해야 될 주제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노인의 이런 사회적 욕구에 대해 ‘주책맞다’ 등과 같은 비난이 팽배한데, 어떻게 노인의 욕구가 배제나 무시당함이 없이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충족될 수 있을 것인가가 결정권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제로 다뤄져야 합니다.

 

정진웅

 

정진웅  연령주의적 사회에서 젠더적 측면으로 살펴보면 노년은 비성적인 존재로 간주돼요.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여성에게 더 일찍 적용되죠. 예를 들어, 영화를 보면 60~70대 남자 주인공이 30대 여성하고 로맨틱한 관계를 갖는 것은 종종 나오잖아요.

할아버지들의 성적인 욕구는 좀 더 승인된다고 봐야죠. 반면, 할머니들의 성적 욕구는 그 자체가 형용 모순처럼 맞지 않다고 여겨지는 문화적인 인식이 있는 거예요. 이것도 결국은 자식 세대와의 관계 속에서 문제가 되는 거라고 봐요.

 

최현숙  제가 구술 생애사 작업을 했던 대구의 한 할머니는 굉장히 보수적인 동네에서 남편과 사별 후 연애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동네 할머니들이 계속 비난을 하는 거예요. 나는 부러움의 뒷면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이 할머니는 계속 연애를 했어요. 그런데 자식들이 알고 반대를 하기 시작했어요. 자식의 반대까지는 버텼지만 결국 사위와 며느리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헤어져 버렸어요. 이후 할머니는 생기를 잃고 정신과를 다닐 정도로 우울증이 심해진 것 같더라고요.

 

정진웅  노년 세대의 자기결정권은 결국 자녀 세대와의 관계와 굉장히 밀접해요. 자녀 세대에게 자기결정권 침해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해도 일종의 문화 심리적인 불편함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경제적 부담, 신체적 부담, 이런 이유들로 노년 세대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면서 그 행위를 정당화시키죠. ‘아빠 미쳤어, 그러다 다치면 어떡해’, ‘남자 만나는 시어머니를 남들이 뭐라 그러겠어’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렇게 노년 세대를 비판하는 서사들은 젊은 세대의 자기중심성을 드러내고, 또 그것을 합리화하는 서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사람들이 노년에 대해 ‘나이 들어서 주책이지’, ‘노망났나’는 말을 쉽게 하잖아요. 노년은 비성적인 존재로 무능하게 있어야 된다는 문화적 고정관념이 있는 거예요.

 

최현숙  노년을 돌봄의 대상으로만 보는 거죠. 하나의 인격 주체이자 욕망을 가진 주체로 보는 게 아니에요. 노년은 무력한 존재이고, 욕망과 의사도 없어야 한다고 보는 거죠.

 

 

사회자  노년의 자기결정권과 관련해서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가요?

 

최현숙

 

최현숙  상대의 상황과 입장을 생각해야 해요. 노인의 건강 문제, 경제적인 여건 그리고 생애사 관점에서 노인의 습관, 취향, 이런 것들을 돌아보면서 노인 입장에서는 어떨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감수성 혹은 상상력을 계속 발동하면서 노인을 만나려고 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진웅  그런 상상력이나 감수성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노년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지금 같은 문화적 토대에서 노년은 쇠퇴해가는 존재일 뿐이에요.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경제적 부담은 기꺼이 감당하는 반면, 경제력을 잃은 노년에 대한 부담에 대해서는 자기결정권 침해로 느끼는 사례들이 훨씬 많아요. 다른 세대와 비교해서 노년 세대를 바라볼 때의 시선이 차별적이지 않은지, 차별적 무의식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가진 인식을 상대화해서 바라보아야 해요. 그런 다음에 상상력이 생기는 거죠. 노년의 모습 속에도 아이같은 모습, 아름다운 모습이 다양하게 있어요. 선입견과 같은 문화적 고정관념을 좀 덜어내야 새로운 수준에서 노년의 긍정성이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행 | 김현정(국가인권위원회 인권교육기획과)
사진 | 전재천(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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