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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로 보는 인권 [2024.05~06] 인권의 발견 누가 시설에 격리되었을까?

 

인권의 발견 누가 시설에 격리되었을까?

 

시설에 갇힌 사람들

 

1998년 7월이었다. 교도소 담벼락 같이 높은 담이 둘러쳐진 곳이었다. 3중의 철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허름한 추리닝 복을 입은 남자들이 창살에 매달려서 울부짖었다. “제발 나를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내가 여기 갇혔다고 집에 좀 연락해 주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옛날 군대 내무반 같은 구조의 방이 나왔다.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나무 침상이 길게 늘어진 곳에서 그들은 갇혀 있었다. 저마다 자신들이 납치되어 들어왔고, 10년도 넘게 갇혀 있었고,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등등을 호소했다. 그 방 입구에는 경찰서 유치장과 같은 방이 두 개가 있었다.

 

쇠창살이 질러져서 안이 훤히 보이는 그 방 벽에는 밧줄이 걸려 있었다. 형제복지원의 박인근 원장을 형님으로 부르던 노재중 원장이 운영하던 부랑인 수용시설 양지마을의 모습이었다.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식으로 군대식 계급이 있었다. 시설 수용원생들을 군대식 폭력으로 다스리기 위해 시설에서 만든 위계였다. 그들은 당시의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조치원역이나 대전역 등에서 술 한 잔 하고 잠들어 있었는데 납치되어 왔다든가, 매일 두들겨 맞고, 대들었다가 맞아 죽은 사람들이 ‘개미고개’에 암매장되었다든가, 여성들에게는 불임시술이 불법으로 행해졌고, 시설장의 눈에 잘 들면 남녀가 합방해서 살 수 있게 했다든가 하는 말들을 처음 들었을 때는 뭔가 과장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300명의 사람들이 이곳에 갇혀서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형제복지원이 드러나기 전에 사실은 인권단체들은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에바다농아원’의 싸움을 알고 있었다.

 

사진=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사진=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8036534&code=61122019&cp=nv

 

 

형제복지원 사건을 계기로 나는 에바다 투쟁을 하던 사람들과 결합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박경석 노들장애인학교 교장이었다. 7년 가까운 투쟁을 통해서 에바다의 비리 법인을 몰아냈다. 이런 경험을 가진 인권단체 활동가들은 2003년부터 본격적인 사회복지시설 조사에 나섰다. 각 단체에 들어온 제보를 공유하고, 조사단을 구성해서 시설조사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 다음해부터는 문제 시설들이 대부분 미신고시설(허가받지 않고 민간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시설)인 것에 착안해서 미신고시설의 문제를 많이 드러냈다. 내가 처음으로 나간 미신고 시설이 충남 연기군에 있던 은혜기도원이었다. 기도원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도원을 가장해서 장애인이나 알코올중독자 등을 수용하던 시설이었다. 사각의 마당을 빙 둘러서 단층의 방들이 있었다. 방 위에는 감시초소 같은 게 있었다. 감시하고 통제하기에는 매우 효율적인 구조임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도 경찰서 유치장 같은 쇠창살이 질러진 방이 있었고, 밧줄이 걸려 있었다. 수용자 중에 말썽을 부리는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수용한다고 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무표정했고, 무기력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어도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방마다 돌아다니면서 활동가들이 조사하는데, 마지막 방이 남았다. 시설 사람들은 그곳만은 한사코 문을 따기를 거부했다. 설득 끝에 결국 문이 열렸는데 컴컴한 방안에 사람이 있었고, 그곳에선 엄청난 악취가 났다.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여성 장애인 한 명을 가둬둔 것이었다. 그것은 문제가 되는 시설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A시설에서는 가족들이 찾아와도 치료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수용자를 만나지 못하게 했고, B시설에서는 허름한 옥탑방에 수용하면서 가족들을 만날 때는 도시의 화려한 인테리어가 갖춰진 곳에서 만나게 했다. C시설에서는 수용된 장애인들을 농장 일에 동원해서 일을 시키면서 임금은 한 푼도 주지 않았고, D시설에서는 장애인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을 일부러 허름하게 운영하여 교회 사람들이 후원금을 내게 했다. 비닐하우스와 같은 곳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시설들 옆에는 시설장과 가족들만의 집이 따로 있었다. 그 집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인들에겐 집안일을 시켰다. E시설에서는 하루 종일 아무런 프로그램도 없이 거주인들을 방치했다. 다만, 이른 아침의 예배, 아침식사, 점심식사, 저녁식사 뒤에 예배가 있었다. 예배는 안수기도라는 방식이었는데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시설의 고질적 문제를 풀기 위해 탈시설운동이 시작되었다.

 

 

형제복지원에서 성병관리소까지

 

형제복지원 생존자 한종선을 만난 것은 2012년 하반기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의 전규찬 교수로부터 국회에 갔다가 1인 시위하는 그를 만났다고 했다. 전 교수는 한종선에게 형제복지원에서 생활했던 일을 만화처럼 그리라고 했다. 전 교수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는 끔찍했던 형제복지원의 폭력 상황을 서툰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가 그려낸 36장의 그림은 어떤 증언보다 생생했다. 그를 만났을 때 그가 했던 첫 마디는 “저는 폭력기계입니다.”였다. 어린 나이에 누나와 같이 끌려갔던 형제복지원에서 극심한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맷집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와 싸우든 이길 수 있었다고 했다. 폭력기계로 길러진 생존자가 무려 35년 만에 세상에 등장했다. 그로부터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이 세상에 나왔고, 그들을 따라서 선감학원 피해자들, 서산개척단 피해자들이 자신들이 당했던 폭력을 말하기 시작했다. 선감학원 사례를 확인하고 대한민국의 사회복지시설이 수용 중심의 폭력시설이 된 연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한종선 씨가 형제복지원 실상을 그린 그림.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한종선 씨가 형제복지원 실상을 그린 그림. 2018.04.17/ 사진출처 : 저작권자 ⓒ KBS 김수영 기자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6/0010567119)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인 1916년 나환자(한센병환자)들을 소록도에 격리수용한 뒤로, 1942년 부랑아 수용소인 선감학원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형제복지원의 원형이었다. 그런 잘못된 격리시설 중심의 수용은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사라진 게 아니라 그대로 유지되었다. 일제가 뿌려놓은 몹쓸 유산이었다. 부랑인, 부랑아에 대한 수용 중심의 정부정책이 장애인, 정신질환자, 기지촌 여성, 외국인노동자 등 우리 사회의 소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국가가 정화하고, 미화하고 싶은 대상들에게 확장되어 행해졌다. 그들을 사회에서 시민으로 살 수 있도록 방향을 잡은 게 아니라 보기 싫고, 더럽고(불결하고), 시끄럽고, 문제가 많은 사람들을 격리해서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버리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미군 기지촌 여성들의 문제도 그렇다. 최근 동두천에서 ‘성병관리소’ 건물을 보전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폐허로 남겨져 있던 건물을 철거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자, 동두천 시민들은 이 건물을 보전해서 아픈 역사를 기억하게 하자고 나섰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한국 땅에 주둔하고 그에 따라서 미군기지 주변에 성매매 관련 업소들이 몰렸다. 성매매 여성들은 파주의 용주골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의정부 뺏벌, 동두천, 평택 등지로 팔려나갔다. 이들은 지독한 폭력과 빚더미를 안고 살아가다가 한많은 인생을 마치게 된다. 이때 정부당국은 성매매 여성들(공식 문서에는 미군 위안부)을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면서 "바이미드링크(Buy me drink)!"를 외치게 했다. 미군들의 안전한 섹스를 위해서는 성매매 여성들의 성병 관리가 필요했다. 정기·비정기 단속을 통해서 미군의 안전한 성생활을 보장하려고 했다. 성병 검사에서 불합격한 여성들을 수용해서 페니실린 주사를 놓던 곳이 이 성병관리소였다. 페니실린 쇼크로 여성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의사들에게 면책을 해주는 방식으로 계속 주사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기지촌 여성들이 지독한 폭력과 학대를 피해서 파출소에 찾아 들어가면 다시 기지촌으로 넘기는 짓을 했다. 정부가 뒷배가 되어 봐주는 동안 업주들은 엄청난 달러를 벌어들였다. 정부의 외화벌이 수단으로 기지촌 여성들이 이용된 것이었다.

 

 

인권의 발견 누가 시설에 격리되었을까?

 

 

모두가 존엄한 인권공동체를 만드는 일

 

부랑인, 장애인, 정신질환자, 한센인, 기지촌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은 어떻게 격리되어 인권유린을 당했던 것일까?

 

국가와 자본이 결합하여 몸 자체를 착취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흔한 사업이었다. 예를 들어 유아와 아동은 입양단체를 통해 외국으로 팔려나갔다. 고아, 부랑아동, 부랑인으로 호명되는 도시하층민은 사회사업제단에 의해 외국원조 물자와 국가의 보조금을 얻기 위해 시설에 갇혔다.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여성의 몸은 안보와 외화벌이를 위해 국가의 관리와 비호 아래 민간인 포주를 거쳐 미군과 외국인 관광객에게 팔렸다. 이렇듯 인간의 몸을 착취할 수 있는 거대한 시장을 만들고 유지하면서 사회의 발전을 꾀했던 국가를 감히 ‘인신매매국가’라 칭할 수도 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형제복지원연구팀, 『절멸과 갱생 사이-형제복지원의 사회학』,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9쪽

 

인신매매국가는 지금도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수많은 미신고 시설들이 노인요양원으로 바뀐 것처럼 인신매매국가의 근본을 바꾸지 않는 한, 국가와 자본이 결탁한 격리시설들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과거의 인신매매국가에서 일어났던 국가폭력들이 진실화해위원회 등의 조사와 법원의 판결을 통해서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런 조사와 판결을 바탕으로 근본적으로 인신매매국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향을 설계해야 한다. 신체의 자유, 자기결정권과 같은 인권의 출발점이 특정인에게 부정된다면, 우리는 인권공동체를 꿈꿀 수 없다. 모두가 존엄한 인권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일, 그것이 탈시설운동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 운동은 지금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인권운동이다.

 

 

글쓴이 박래군은 인권운동가로 4·16재단 상임이사,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

 

글 |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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