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기 [2024.05~06] #1 생활동반자법과 외롭지 않을 권리
외롭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이 너무 외롭고 불안하다고들 얘기한다. 외로움은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다. 객관적인 삶의 조건으로 일상의 평온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기도 한다. 외롭다는 건 우리가 퇴근 후 집에 가도 행복하게 쉴 방법이 없다는 것이고,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몇 곱절 더 힘들게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또 위급하게 아프거나 다쳤을 때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더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외로울까? 차이기 전에 애인한테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모난 성격이나 팔자 때문에? 결혼이나 연애, 출산을 할 만큼 돈을 모으지 못해서? 가족이랑 사이가 좋지 않거나, 또 직장이나 학업 등의 이유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노동시간이 너무 길어서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어서일까. 우리의 외로움은 스스로의 과오, 어쩔 수 없는 요인, 사회적 환경 등 여러 요인이 뒤섞인 결과이다.
그렇게 볼 때 우리의 외로움은 정책이나 제도와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친구나 애인 만들기, 마음 다스리기 등 외로움을 개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들은 참 많다. 반면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제도와 정책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부족하다. 특히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결혼이나 출산을 통해 가족을 새로 만드는 것을 거부하는 ‘외로운 나라 대한민국’에서, 이 집단적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도와 정책이 중요하다. 나는 <외롭지 않을 권리>(시사IN북)를 통해서 고독하지 않게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국민들의 기본적 권리이며, 이를 이루기 위해 정책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생활동반자법’은 그 대표적 과제다.
생활동반자법은 혼인과 혈연 외 '동거 가족'도 법적으로 인정하는 법이다. 두 성인이 서로 함께 살기로 합의하고, 생활동반자를 맺기로 했다고 법원 또는 지자체에 등록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정부는 생활동반자 관계인 둘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복지혜택과 법적 권리를 보장한다. 또 헤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재산 분할, 손해배상, 가정폭력 피해 등의 갈등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에 관한 법이기도 하다.
생활동반자법을 결혼과 비교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쉽다. ‘혼인 제도’는 신분, 국적까지 바꾸는 무거운 제도다. 반면 ‘생활동반자법’은 혼인 제도에서 실제로 성인 둘이 안정적이고 평등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핵심만 간추린 것이다. 그렇기에 결혼이 서로 성적으로 사랑하는 이성 간에만 가능하다면, 생활동반자법은 둘의 성별이나 같이 살고자 하는 이유를 한정하지 않는다. 친구, 연인, 먼 친척 사이 등 뜻과 상황이 맞는 둘이 서로 돌보며 함께 살고자 자발적으로 약속하기만 하면 된다.
또 결혼이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영원한 관계를 전제하지만, 생활동반자법은 그렇지 않다. 둘이 뜻과 상황이 맞아 서로 합의할 수 있을 때까지만 같이 산다는 전제를 갖고, 한쪽만 원해도 해소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대신 해소 의사를 상대방에게 명확히 알려야 하고, 재산분할이나 손해배상 절차를 명확히 해 서로 간의 피해가 없도록 한다.
생활동반자법이 만들어지면, 친구나 연인과 공공임대나 노인복지주택(실버타운) 등에 함께 입주할 수 있다. 소득세나 국민건강보험에서 피부양자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 생활동반자가 아플 때 돌봄휴직을 쓸 수도 있고, 생활동반자가 출산 할 때 출산휴가를 쓸 수 있다. 갑자기 수술 등 치료를 받아야 할 때 보호자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한 쪽이 사망했는데, 시신을 인수해 장례를 치르는 문제에서도 일정한 권한을 가진다.
생활동반자가 서로 헤어질 경우, 생활동반자 기간에 함께 이룬 재산에 대해서는 재산분할권이 있다. 가사노동, 돌봄노동 등 집안에서 이뤄지는 노동의 가치도 인정받을 수 있다. 특히 현행법에서는 동거 등 법 밖의 가족은 가정폭력처벌법 등 가정폭력 예방과 피해자 보호를 위한 제도를 적용받지 않는다. 생활동반자법을 통해 동거 가정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을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들은 동거가족 내에서 재산권 침해, 폭력 등을 당할 가능성이 더 높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방안들이다. 우리 가족법은 여성, 아동 등 가족 내 약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생활동반자들은 이런 발전한 가족법을 동거 가구로 확대해 적용하는 것이다.
‘동거’라고 하면 아직도 무책임하고 떳떳하지 못한 청춘들의 불장난이라는 사회적 편견이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미 다양한 동거 가구들이 많다. 사별이나 이혼으로 첫 번째 결혼이 끝난 중노년들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혼인신고가 쉽지 않다. 결혼을 끝낼 때의 난관을 다시 겪기도 어려울뿐더러 재혼을 하면 재산이나 자녀 친권, 상속 등의 문제가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거나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연인들도 동거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식을 하고도 주택 청약 등의 시기에 맞춰 혼인신고를 미루는 경우도 많다.
비혼 인구가 늘어나면서 동성 친구 사이에도 책임감 있는 가족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동성 연인들도 단순히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수준을 넘어 건강보험 피부양자 인정, 양육과 돌봄 권리 등 구체적인 법적 권리들을 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 노인 인구가 폭증하면서 노인들 간의 동거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외롭지 않은 노후를 보내려는 개인적 욕구뿐 아니라, 고독사나 돌봄 공백 등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정책적으로도 노인 1인 가구들이 모여서 살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고민하고 있다. 이미 우리 사회의 가족이 이렇게 다양해진 만큼 국민인식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2021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1 ‘혼인·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함께 거주·생계를 공유하는 관계이면 가족이 될 수 있다’에 동의한다는 답변이61.7%였고, ‘법률혼 이외의 혼인에 대한 차별 폐지가 필요하다’는 답변이 76.9%였다. 또한 ‘법과 제도가 새롭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 구성원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응답이 71.2%였다. 생활동반자법 제정은 이미 바뀌고 있는 사회와 국민인식에 제도를 맞춰나가는 과정이다.
헌법재판소는 혼인의 자유와 혼인에 있어서 상대방을 결정할 자유가 개인의 인격권 및 행복추구권의 중요한 내용이라고 규정한다.2 즉 내가 누구와 살 것인가를 결정할 권리는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혼인이 아닌 방식으로 가족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경제적, 사회적 이유 또는 연령, 가족형태, 성적지향 등의 이유로 결혼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혼인이 아닌 방식으로도 누군가와 안정적으로 함께 살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라고 볼 수 있다. 혼인의 자유를 넘어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질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국민들의 가족생활조차도 국가발전의 도구로 삼아 왔다. 가령 산아제한이 있던 1960, 70년대에 아이를 여럿 낳으면 나라를 가난하게 만드는 원흉이었지만, 이제는 애국자란 소리를 듣는다. 애를 몇 명 낳고 싶다는 각자의 마음은 그대로인데 나라의 발전단계에 따라 필요한 인구가 달라졌을 뿐이다. 이렇게 국가가 필요한 기준에서 벗어나는 삶은 쉽게 평가받고 모욕 당해왔다. 이제 국가의 필요에 맞춰 국민의 삶을 재단하는 단계를 넘어 국민 각자가 맥락에 맞게 선택한 행복을 국가가 제도와 정책으로 보장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그것이 한국 민주주의가 열어가야 할 다음 단계다. 생활동반자법은 그 중요한 시작이 될 것이다.
1) 여성가족부, <가족 다양성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 2021년 5월.
2) 헌법재판소 89헌마92 등
글쓴이 황두영은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며 생활동반자법 입법을 추진했고, 청와대 행정관 등으로 일했다. 지은 책으로 「외롭지 않을 권리」, 「성공한 민주주의, 실패한 민주주의」 등이 있다.
글 | 황두영(작가, <외롭지 않을 권리>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