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는 시간 [2024.01~02] 런던에서 다시 보는 영화 <패딩턴>
‘사람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사람을 만든다.’ 윈스턴 처칠의 말로 자주 인용되는 문장이다. 처칠의 말을 정확히 옮기면 다음과 같다. ‘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our buildings shape us.’ 사람은 건물을 만들고 그 건물은 사람을 만든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런던 폭격으로 도시 곳곳이 폐허가 됐을 때, 당시 총리였던 처칠은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하원 회의장 재건과 관련해 위와 같은 말을 했다. 치열한 토론이 필요한 하원 회의장은 널찍하고 쾌적한 공간이 아니라 서로의 목에 선 핏대가 보일만큼 밀도 있는 격론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한 말이었다. 사람과 공간은 상호 영향을 받는다. 사람과 도시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각기 다른 꿈, 각기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도시가 탄생했다. 다양한 존재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곳이 도시이기에 도시는 결코 단색화일 수 없다. 무질서 속의 질서, 질서 속의 무질서가 기묘하게 작동하는 도시는 점묘화를 닮았다. 색색의 점들이 모여 아름다운 전체를 이루는 점묘화처럼 도시도 다양한 색과 형태를 포용할 때 생기를 얻는다. 도시는 포용하고 유동해야 한다. 그러니 도시의 미덕은 관용이어야 한다.
새로운 가족과 거처를 찾길 바라며
어쩌다보니 지금 이곳은 런던이다. 런던의 지하철 곳곳에서 심심찮게 “Be Kind” 라고 적힌 광고판을 발견하게 된다. 런던시에서 진행하는 캠페인인지 런던 지하철에서 진행하는 캠페인인지 아니면 그게 그거인지 알 수 없지만, “친절하게”라는 문구가 어쩐지 차갑고 도도한 이 도시의 인상을 한결 누그러뜨린다. 친절함! 그것은 <패딩턴>의 꼬마곰 패딩턴이 런던에 도착한 첫날 사람들에게 기대했던 것이기도 하다.
영국인이 사랑하는 사고뭉치 꼬마 곰 패딩턴의 고향은 남아메리카의 페루다. 페루의 깊은 숲속에서 루시 숙모, 패스투조 삼촌과 행복하게 살던 패딩턴은(사실 이 이름은 런던에서 만난 브라운 가족이 지어준 이름이다) 갑작스런 대지진으로 삼촌을 잃은 뒤 삼촌이 쓰던 낡은 모자와 마멀레이드 잼이 든 가방을 들고 혼자서 런던으로 밀항한다. 루시와 패스투조는 과거 페루를 찾았던 런던의 탐험가와 우정을 쌓으며 런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탐험가의 이야기 속 런던은 적어도 피란길의 아이들을 돌봐주던 선의와 온정이 있는 도시였다. 루시는 조카의 목에 “이 곰을 돌봐주세요, 감사합니다”라고 쓰인 푯말을 걸어준다. 조카가 런던에서 새로운 가족과 거처를 찾길 바라며 이런 말도 보탠다.
“그들은 이방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잊지 않았을 거야.”
그런 기대는 순진한 것이었을까. 기차역에 도착한 패딩턴은 사람들과 부드럽게 눈을 맞추고 모자를 벗어 예의 바르게 인사하지만 갈 길 바쁜 사람들은 어린 곰을 신경 쓰지 않는다. 이후 패딩턴의 가족이 되는 헨리 브라운도 처음엔 이렇게 경계한다. “전방에 위험한 이방인 출현. 눈 맞추지 말고 계속 걸을 것.” 하지만 친절한 메리 브라운은 반짝이는 눈으로 패딩턴의 사정을 경청한다. 패딩턴 역의 이름을 따 패딩턴이라는 인간의 이름을 지어주고, 런던의 탐험가를 찾기까지 보금자리를 내어주는 것도 메리다. 그렇게 브라운 가족(아빠 헨리, 엄마 메리, 딸 주디, 아들 조너선, 친척 할머니 버드)의 집에 머물게 된 패딩턴은 그날밤 다락방에서 루시 숙모에게 편지를 쓴다.
“런던은 우리가 상상한 것과 달라요. 이방인 곰이 머물만한 곳을 찾기란 쉽지 않네요. 그렇지만 운이 좋게도 브라운씨 가족을 만났어요.”
이방인에게는 가슴 먹먹한 드라마
‘패딩턴’은 반세기 넘게 세계적으로 사랑받아온 인기 곰이지만, 런던에서 영화 <패딩턴>을 다시 보는 경험이란 이방인의 난감한 심정에 절절히 몰입하게 되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누군가에게 <패딩턴>은 귀여운 꼬마 곰의 좌충우돌 모험담일 수도 있고 런던이라는 도시의 매력에 빠져들게 하는 영화일 수 있지만, 패딩턴처럼 낯선 도시에서 낯선 이들과 부딪혀 살아본 적 있는 이방인에게는 가슴 먹먹한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고향 페루에서 잘 익은 마멀레이드로 만든 달콤한 잼을 따스한 햇볕 아래서 원없이 먹을 수 있었던 패딩턴은 이제 모자 아래 숨겨둔 비상식량(마멀레이드 잼을 바른 샌드위치)을 비둘기에게 뺏길까 노심초사하는 처지가 된다. 자발적 여행자의 신분으로 물가 비싼 런던에 와 비자발적으로 가난한 여행자가 된 나는 여행가방 안에 하나씩 챙겨온 컵라면과 즉석밥을 어느 시점에 꺼내먹어야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패딩턴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이 비교가 너무나도 우습다는 것은 알지만).
기준과 자격의 적용에서 작동한 건
춥고 배고픈 이방인을 더욱 위축시키는 건 옹색한 기준과 잣대와 표준들이다. 페루를 찾았던 영국 탐험가는 탐험가 협회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곰들이 “영리한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고지식한 협회 사람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문명과 야만을 손쉽게 나눈다. “곰들이 영어를 하나요? 크리켓은? 십자낱말 퍼즐은 할 줄 알아요?”
“집에 곰이 있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이죠?”라는
메리 브라운의 말을 살짝 비틀어 보자.
이 도시에 곰이 있다는 것은
꽤 근사한 일 아닐까?
반대로 영국의 신사들은 곰들의 언어를 할 줄 알까? 마멀레이드 잼 만드는 법은? 나무 타는 법은? 문득 한국에 유학온 학생들의 통장 잔고를 문제 삼아 불법체류 운운하며 강제 출국시켰던 한 대학의 사례가 떠오르는데, 기준과 자격의 적용에서 작동한 건 결국 이상한 우월주의다. 인간의 도구 사용법에 서툴러 종종 사고를 치지만 패딩턴은 우월의식에 가득 찬 인간보다 낫다. 영리함도 영리함이지만 이웃의 안부를 물을 줄 아는 친절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친절해지는 건 결국 우리의 몫
패딩턴은 1958년 마이클 본드가 지은 아동문학 <내 이름은 패딩턴>을 통해 처음 세상에 존재를 알렸다. 실제로 마이클 본드는 전쟁을 피해 집과 가족을 떠나야 했던 아이들과 낯선 나라로 이민과 망명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사연을 패딩턴 시리즈에 반영했다고 한다. 패딩턴은 의인화된 곰이다. 영리한 의인법 덕에 패딩턴 시리즈는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원작자의 의도를 충분히 알고 있는 폴 킹 감독은 영화 <패딩턴>과 <패딩턴2>에서 이방인, 난민의 서사를 상업영화의 문법으로 솜씨 좋게 그려낸다. 2편에선 이를테면 런던 생활 3년차에 접어든 패딩턴이 ‘외국인 (곰) 노동자’ 신분으로서 겪는 고충과 억울함을 한바탕 모험담으로 풀어낸다. 루시 숙모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고가의 생일선물을 사기 위해 이발사 보조, 창문닦이, 아쿠아리움 청소 등 궂은 일을 하며 한푼 두푼 모으는 패딩턴의 모습에서 누군가는 귀여움 너머의 씁쓸함을 보기도 할 것이다. 어쨌거나 패딩턴은 신기한 곰이다. 우리 안의 선한 본성을 비추는 거울을 들고 있기라도 한 듯, 패딩턴은 우리 안의 친절을 일깨운다. 친절해지는 건 결국 우리의 몫이다.
글쓴이 이주현은 전<씨네21> 기자이자 편집장이다. 지금은 잠시 여행하며 즐거운 고생을 사서 하는 중이다.
글 | 이주현(전 씨네21 편집장)
사진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