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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바로미터 [2024.01~02] ‘배트맨 없는 디지털 고담시’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주민의 디지털 인권 침해 실태 조사를 진행해 보니

 

현실의 변화와 연동되지 못하는 규범의 발전은 인권 침해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알리바이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보다 심각한 경우는 규범 자체가 부재하는 경우다. 지난 1년 나와 동료들이 ‘인권침해 실태 조사’라는 이름으로 관찰한 디지털 공간이 그렇다.

 

‘배트맨 없는 디지털 고담시’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디지털, 규범과 개념 없는 인권 침해의 해방구

 

흔히들 인권의 발전은 인권 규범의 발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들 한다. 현실의 변화와 연동되지 못하는 규범의 발전은 인권 침해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알리바이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보다 심각한 경우는 규범 자체가 부재하는 경우다. 유례없이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인권 침해 행위를 일반화할 수 있는 개념 자체가 부재하는 경우다. 이 때 인권 침해 행위는 규율되기는 커녕 식별하는 것 조차 어려워진다. 지난 1년 나와 동료들이 ‘인권침해 실태 조사’라는 이름으로 관찰한 디지털 공간이 그렇다. 그 곳은 인권침해의 해방구다. “인간의 존엄과 정체성이 착취와 희롱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 곳에서는 규율될 수도 개념화될 수도 없는 악행과 폭력의 헬게이트들이 무한 증식, 변이한다. 회복과 구제의 가능성이 전무한 상태에서 피해자들의 고통은 영구화된다. 인류가 어렵게 이룩한 인도주의적 가치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은 가차없이 조롱당한다.

 

 

오프라인에서처럼, 온라인에서도, 그들은 능동적인 행위자들이다

 

나와 동료들은 디지털 공간에서 이주민의 인권 침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650여명의 성인 이주민과 이주배경 청소년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와 면접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를 확인해보고자 페이스북이나 샤오홍슈(小??) 등 이주민들이 선호하는 소셜미디어에 접속해 ‘채무, 물품판매, 송금, 환전, 구직, 피싱, 개인정보 도용 등’ 9개 범주 44개의 피해 사례를 수집, 분석하였다.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한 첫 번째 사실은 이주민들이 매우 능동적인 디지털 유저들이라는 점이다. 이주민들에게 소셜미디어는 게임이나 유튜브, 메신저 등 ‘사적인 용도’ 이외에 ‘구직, 상품 구매, 송금이나 환전 등의 금융, 비자’ 등 ‘사회적인 용도’로도 전방위적으로 활용된다. 정부가 고수하는 ‘단기 순환, 정주화 방지’ 정책 기조로 인해, 제한된 공간에서의 고립된 생활만이 허용되는 탓에 이주민들의 소셜미디어 의존도는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성인 이주민의 디지털 서비스 하루 평균 이용 시간은 ‘3시간 이상’이 전체 응답자의 41.6%였으며, 이주배경 청소년의 경우 ‘5시간 이상’이 47.9%로, 한국인 평균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꼭 필요하지만, 접근조차 어려운, 온라인 공공 서비스

 

주목할 것은 이주민들이 능동적인 디지털 유저들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공공 기관 온라인 서비스 사용율은 매우 낮다는 점이다. ‘법무부 사회통합 프로그램’과 ‘국세청 홈택스’ 서비스는 체류 자격 유지 및 업그레이드, 납세와 환급 등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이주민들에게는 필수적인 서비스들이다. 그러나 그 사용율은 60%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 프로그램을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이용하는 비율은 더욱 낮아서 30%대 초중반에 그친다. 공공 기관 온라인 서비스가 이주민들에게 외면받는 이유는 ‘불필요’해서가 아니라 꼭 필요하지만 ‘접근’ 자체가 어려운 탓이다. ‘어렵고 복잡한 가입절차와 이용방법’, ‘제한된 언어 서비스’, ‘모바일 기반이 아닌 PC 기반의 구동체제’ 등 삼중, 사중의 진입 장벽이 이주민의 공공기관 온라인 서비스 접근을 가로막는다.

 

 

가중되는 취약성, 능동적인 대응

 

‘배트맨 없는 디지털 고담시’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돈이 필요해가지고 소액 대출 받았어요.
이자가 계속 부풀어 오르면서 2백만원을 빌렸는데
얼마 후에 갚을 돈이 8백만원으로 늘어났구요.
이자가 늘어나는 속도가 하도 빠르니까 아무리 갚아도 갚아도
안 갚아지는 거예요. 그 때 신체 사진이라든지 비디오라든지
요구하는 일이 많이 일어나요. 아예 처음부터
돈 빌려주는 조건으로 옷을 벗고 신분증 같은 거 들고
사진 찍어서 보내줘야 하는 경우도 있고요.”


 

보안이 취약한 영리적인 디지털 매체 의존도가 높은 탓에 이주민들은 디지털 폭력이나 인권 침해의 피해자가 될 확률도 높아진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이주민들의 28.7%는 온라인 상에서 개인 정보 침해 및 악용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온라인 ‘판매 사기’의 피해를 경험한 경우와 성적 폭력 피해 곧 ‘선정적 사진·동영상, 성적 대화나 성매매 제안’ 등을 받은 경우도 18.5%에 달했다. 디지털 매개 폭력 및 인권 침해의 심각성은 일회적 사건으로 종결되기보다는 무한 확장, 영구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조사도 그 점을 확인시켜주었다. ‘온라인 괴롭힘 및 성적 피해’ 이주민들의 경우 2회 이상 피해를 당한 비율이 54.5%에 달했다. 개인정보 침해 및 악용 피해를 당한 이주민들이 온라인 사기 및 구직 그리고 성적 피해를 추가적으로 당할 확률은 피해 경험이 없는 이주민에 비해 거의 3배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면접 조사를 통해 ‘불법 대출, 불법 촬영, 개인정보의 강제 공개’ 등 타깃이 된 피해자에게 다양한 유형의 범죄 행위가 연속적으로 자행되는 적지 않은 사례들이 확인된 바 있다.

 

반복적, 누적적으로 피해를 경험한 이주민들의 고통과 손실은 가늠하기 어렵다.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요, 재발의 가능성은 매우 높되 회복과 구제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점에서 극도의 불안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디지털 매개 폭력 피해 이주민의 71.4%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후유증을 호소하는 한국인 피해자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주민들의 피해 대응은 한국인 일반에 비해서는 매우 능동적이다. 피해 이주민의 14.5%는 ‘경찰 등 공공 기관에 신고’하는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피해를 당했음에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경우는 7.2%에 그쳤다.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사이버 성폭력 피해를 당한 한국인들의 경우 79.3%가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으며 경찰에 신고한 경우는 1.6%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이주민 피해자들의 대응은 상대적으로 매우 능동적이라 평가할 만한 수준이다.

 

 

낮은 구제 가능성, 불가피한 사적 제재의 선택

 

‘배트맨 없는 디지털 고담시’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디지털 매개 폭력을 당한 이주민 피해자의
60% 내지 70%는 숨어서 그냥 참고 넘어가는 거고
그 중에서 10% 정도만 뭐든 대응해 보려고 했는데
이것도 쉽지 않으니까 포기하게 되는 거죠.”


 

그러나 다수의 이주민 피해자들은 피해를 당했음에도 공권력의 조력을 요청하는 방식의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지 못한다. 가장 큰 이유는 정보의 부족이다. ‘피해구제 기관이나 구제 방법과 절차를 모른다’는 응답이 58.3%에 달한다. 그 밖에 면접 조사를 통해 확인된 적극적인 대응의 장애물들에는 ‘신고절차의 복잡함, 소통의 어려움, 비우호적인 수사기관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 피해 구제가 아닌 체류 자격 충족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주민 관련 법제, 구제 과정에서 발생하는 체류의 위협에 대한 불안’ 등이 포함된다.

 

상대적으로 빈곤한 이주민의 디지털 리터러시* 역량도 적극적인 대응의 장애물이다. 디지털 리터러시나 인권 교육을 받아 본 경우는 전체 이주민의 1/3정도에 불과했다. ‘온라인 공간 모욕 및 명예훼손 피해시 신고 방법을 아는 경우’ 역시 34.4%에 그쳤다. 능동적인 대응 의지는 있으나, 공권력으로부터 정당하고 효율적인 조력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는 이주민들이 불가피하게 선택하는 대응책이 ‘사적 제재’이다. 이주민들의 디지털 공간에는 여과없이 ‘가해자’의 개인 정보를 공개하고 있는 수많은 사적 제재 사이트들이 존재한다.

 

 

배트맨이 없어도 안전한 디지털 고담시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이번 조사를 통해 우리 연구진이 확인한 사실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이렇다. 오프라인에서와 마찬가지로 온라인에서도 이주민들은 능동적인 행위자들이다. 그러나 온라인 공공 서비스의 높은 진입 장벽, 파편화된 규범 체계, 개념의 부재, 비우호적인 공권력의 태도, 디지털 폭력의 해악에 대한 저평가, 사회적 무관심, 이주민 피해자의 상대적으로 빈곤한 디지털 리터러시 등 구조적, 제도적, 행위자적 요인이 중첩되어, 이주민 다수의 잠재적인 디지털 폭력 피해자로서의 취약성은 가중되는 데 반해, 회복과 구제 가능성에 대한 전망은 비관적이다. 디지털 인권 침해와 폭력의 피해가 단순히 한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비극적인 재앙으로 그치지 않고, 인권과 인도주의적 가치 전체에 대한 심대한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과 파괴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제고될 수 있어야 하며 그를 규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들의 지체없는 도입이 강구될 수 있어야만 한다.

 

‘배트맨 없는 디지털 고담시’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면접 조사에 참여한 이주민들이 제안하는 최소한의 조치에는 ‘디지털 매개 폭력의 심각성에 대한 홍보와 교육, 공공성과 안전성 그리고 편의성이 개선된 소셜미디어 환경 구축, 한국 사회와 이주민 공동체의 오프라인 교류 공간 확대, 피해자 구제를 위한 전담 상담소 및 지원 센터의 설치, 문화나 관행의 차이로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범법자화되는 이주민 피해자 구제를 위한 특별한 조치’ 등이 포함된다. 그것들이 즉각적으로 시행되고 도입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전사회적이고 실효적인 논의가 당장 시작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한참이나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당장.

 

*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 : 디지털 시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보 이해 및 표현능력으로,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이라는 리터러시(Literacy)가 디지털 플랫폼과 만나 다양한 미디어를 접하면서 명확한 정보를 찾고, 평가하며 조합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을 뜻한다.

 

 

글 | 오경석(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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