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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023.11~12] 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정치적 권리

 

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정치적 권리

 

<세계인권선언문>에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말이 있을까? 당연히 있을 것 같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비교정치학자인 후앙 린쯔(Juan Linz)의 유명한 표현대로, 민주주의는 이제 여러 정치체제 중에서 ‘유일하게 정당성을 인정받는 게임(only game in town)’이 되었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정권들조차 스스로를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민주주의가 아닐수록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포장하기에 바쁘다.

 

이런 상황이라면 인권을 보편적으로 보장하자는 선언문에서 정치를 언급하는 조항에 당연히 민주주의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이 선언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30조나 되는 선언문에서 정치에 대해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는 제21조에서 중요한 단어는 ‘대표(representative)’다. 이 조항에 따르면 사람들은 정치에 직접 참여할 권리를 갖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대표를 통해서 참여한다.

 

대표라고 하면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사람들이 우선 떠오른다. 하지만 선거 이전에도 인류 역사에서 공동체라는 것이 만들어져서 그것을 통치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곳에서는 늘 ‘대표’가 있었다. 그리고 인권의 보장을 포함해서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그 대표가 어떤 사람이냐, 어떻게 그 대표를 뽑느냐, 어떻게 그 대표를 통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 조항에는 또 하나 특별한 단어가 있다. ‘피플(people)’이다. 이 단어는 보통 학술적으로는 ‘인민주권론’에서처럼 ‘인민’이라는 용어로 많이 번역된다. 어떤 이들은 저항적 의미를 가미해서 ‘민중’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또 여기서처럼 ‘국민’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국민’이라는 개념은 18세기 이후 근대 국민국가가 생긴 이후에 나온 것이다. 그래서 굳이 학술적인 개념어를 피해서 원래의 의미를 살리자면, 그 뜻은 ‘보통사람들’에 가깝다.

 

이 용어는 ‘선언문’에서 몇 번이나 나올까? 인간의 권리에 대한 선언문이니 이 단어가 자주 쓰였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조항에서 딱 한 번 나온다. 선언문에서 인간을 가리킬 때는 대부분 ‘Human Beings’를 쓰고, ‘모든 사람에게 ~이 보장되어야 한다’든가 ‘누구도~ 해서는 안 된다’는 문장을 쓸 때는 ‘Everyone’이나 ‘No one’으로 시작한다. 사실 이 21조 3항에서 ‘people’이 쓰인 것에는 나름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보통사람들’이 뜻하는 바에 각별한 맥락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people)’과 ‘시민(citizen)’의 차이

 

우리말에서 정부라고 번역되는 ‘거번먼트(government)’는 선언문에서 몇 번이나 나올까? 이 단어도 21조를 제외하면 나오지 않는다. 인권을 보장해야 할 주체가 일반적으로 정부일 것이기 때문에 여러 번 나올 것 같지만,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 ‘government’라는 단어도 번역하기가 여간 까다롭다. 정부라는 뜻보다 더 넓은 의미의 ‘통치’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을 업으로 하는 입장은 ‘통치’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은 때가 종종 있는데 이 조항도 그렇다. ‘사회계약론’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존 로크의 저작도 한국에서 ‘정부론’이 아니라 ‘통치론’으로 번역되고 있으니까 아주 낯선 일은 아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맥락적 의미를 살려서 21조의 1항과 3항에 나오는 부분을 살짝 바꿔서 번역해 보면, 1조는 ‘모든 사람은 직접 또는 자유로이 선출된 대표를 통하여 자국의 통치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가 되고, 3항은 ‘보통사람들의 뜻이 통치 권위의 기반이다’가 될 것이다.

 

제21조

1.
모든 사람은 직접 또는 자유로이 선출된 대표를 통하여 자국의 정부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람은 자국에서 동등한 공무담임권을 가진다.
3.
국민의 의사가 정부 권능의 기반이다. 이러한 의사는 보통·평등 선거권에 따라 비밀 또는 그에 상당한 자유 투표절차에 의한 정기적이고 진정한 선거에 의하여 표현된다.


 

우리는 근대에 인간의 권리가 크게 성장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그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들을 ‘근대 시민혁명’이라고 부른다. 특히 영국, 미국, 프랑스에서 혁명을 통해 일어난 변화에서 두드러진 것은, 이전까지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표’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전쟁이나 세금 같은 국가의 중대사에 ‘보통사람들’의 의견이 전달되고 영향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의 주장은 국가 운영에 반영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근대 시민혁명을 통해서 이제는 보통사람들도 ‘통치’에 참여할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보통사람들’이 곧바로 그런 권리를 갖게 된 것은 아니다. 그때만 해도 참정권은 ‘사람(pepople)’의 권리가 아니라 ‘시민(citizen)’의 권리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사람과 시민이 뭐가 다르다는 것일까? 지금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상식이었다.

 

혁명 이전까지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만 통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었다. 왕이나 귀족이나 성직자 계급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상업이 발달하면서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층이 생겨났고, 이들이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는 기나긴 과정이 곧 시민혁명이었다. 특별히 미국에서는 이 과정이 식민지에서 독립하는 과정과 겹친다.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사람들은 ‘대표없이 과세없다’는 슬로건처럼 처음에는 참정권을 요구했지만, 영국이 이를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독립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사람’과 ‘시민’은 차이가 있었다. ‘사람’들은 보편적 권리를 갖지만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했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재산과 학식, 교양이나 국적 같은 특별한 자격을 갖춘 ‘시민’들이었다. 계몽주의자들조차, 아니 그들이야말로 오히려 더욱 다수의 ‘평민들(commons)’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위험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프랑스혁명 인권선언’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선언의 정식 명칭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된 것, 미국혁명의 결과 만들어진 제헌헌법에서 노예의 참정권이 제외된 것에는 이런 맥락이 있다. 프랑스혁명 인권선언의 내용을 보면, 모든 인간은 기본적 인권을 갖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통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시민’들이다.

 

그런데 오늘 이 <세계인권선언문>에서는 사람과 시민의 구분이 없어졌다. 보통사람들의 뜻이 통치의 기반이 되고, 누구나 정치에 참여하고 대표를 뽑을 권리를 가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21조 3항의 주어를 ‘국민’으로 번역하는 것은 원래의 뜻을 충분히 다 반영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1·2항과 3항의 차이다. 1·2항에서 선거권을 말할 때는 ‘그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3항에서는 그런 제한이 없다. 선거권은 없더라도 원리적으로 모든 보통사람들이 통치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있다고 봐도 좋다고 생각한다.

 

선거권을 넘어 누구나 피선거권도 중요하다. 21조의 2항이 그 내용을 담고 있다. 다른 사람을 뽑을 권리만 있고 그 자신이 ‘대표’가 될 자격은 없는 상황에서는 정치적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피부가 검은 사람은 선거권은 갖지만 후보자로 나설 수 없다든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든지 하는 경우가 그렇다.

 

 

인권을 잘 보장할 수 있는 ‘대표’는 누굴까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처럼 공직을 추첨에 따라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맡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체로 정치적 대표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그런데 이 선거라는 것이 참으로 묘해서 보통사람들보다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이 뽑히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나와 같은 사람보다는 나보다 잘난 사람을 대표로 뽑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닮음’보다는 ‘다름’을, ‘유사성’보다는 ‘탁월성’을 선택하는 것이다. 둘 다 일리가 없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어디서 균형을 맞출 것인가에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모두가 정치적 대표가 될 수 있지만, 선거에서 뽑히려면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많은 장벽이 존재한다. 그래서 정치학자들은 ‘선거’에 본질적으로 귀족정의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선언문 21조는 인권을 더 잘 보장하기 위한 정치적 조건이자 그 자체로 정치적 권리라는 인권에 대한 조항이다. 그런데 이 조항은 대표를 잘 뽑고, 그를 잘 통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누이 역설한다. 보통사람들이 대표를 잘 뽑아서 통치가 잘 이루어질 때, 인권도 잘 보장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공정한 선거를 하자는 의미를 넘어선다. 민주적이고 투명한 선거를 통해 뽑힌 사람이 인권을 탄압한 사례는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이제 얼마 있으면 또 선거가 다가온다. 인권을 잘 보장할 수 있는 대표가 누구인지 생각해 볼 시간이다.

 

 

글. 이관후(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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