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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보기 [2023.11~12] #3 1948, 2008, 2014 … ‘선언’은 계속 선언되어야 한다

 

우리는 왜 인권을 다시 선언 하는가

 

HUMAN RIGHT DAY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 인류는 인간의 생명과 존엄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5천만 명이 넘는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고, 수천, 수백만 명이 집과 재산을 잃었다. 잿더미가 된 일상과 인류애 상실을 경험하게 된 전 세계는 전쟁이 만들어낸 참상이 가져온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탄생한 것이 지금의 ‘세계인권선언문’이다. 법적 구속력 없는 ‘선언’에 불과하지만, 모든 사람의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대원칙을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이 선언문이 발표된 지 75년이 흘렀다.

 

여전히 세계는 전쟁 중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이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간의 전쟁도 시작되었고, 주변국의 개입과 확전 가능성마저 있는 위기 상황이다. 어디 이곳 뿐일까. 화약고처럼 곧 터질 것 같은 지역이 한두 곳이 아니다. 뉴스에선 전쟁 참상이 계속 보도되고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민간인의 죽음은 한 개인의 삶이 삭제된 채 숫자로만 표시되고 있다. 무너진 건물더미 아래서 오열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시민의 모습은 과연 지금이 2023년인지 의심마저 들게 한다. 전쟁이 벌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방산 산업이 활개 치고 있고 전쟁 무기가 박람회에 전시되는 현실 속에서 75년 전 약속했던 인권의 가치가 무엇이고, ‘인류애’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다시 묻게 된다.

 

UN은 2023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일을 기념하며 존엄, 자유, 모두를 위한 정의를 다시 강조하고 있다.1) 전쟁뿐만 아니라, 불평등, 갈등, 인종차별, 기후변화, 전염병 등과 같이 존엄과 평등에 대한 약속을 위협하는 다양한 도전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위기는 한국도 피해갈 수 없다. 최근 한국 사회를 보더라도, 인권은 부정되고 있고 혐오와 낙인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자리는 사라지고 있다. 2022년 국민 인권의식실태조사2)에 따르면 응답자의 68.8%가 우리나라 인권상황이 1년 전과 비교해 비슷하거나 나빠지고 있다고 보았다. 국가인권위원회 권고에도 불구하고 인권의 기본법으로 불리는 평등법은 15년째 제정되지 못하고 있고, 이미 제정된 학생인권조례마저 개악되거나 폐지될 위기에 놓여있다. 인권의 가치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세계인권선언’이 말하고자 했던 가치와 정신을 다시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인권을 다시 선언하는 이유

 

세계인권선언문은 인권운동에도 중요한 문서다. 특히 사회적 약자, 소수자 인권운동은 세계인권선언문을 통해 권리의 중요성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양한 권리 항목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감시자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당시 포함되지 못한 차별의 문제가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말하는 것 또한 인권운동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권운동은 세계인권선언문을 기본으로 다양한 인권선언을 재창조해내며, 그 시대 상황을 담고자 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인권을 새롭게 선언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멋들어진 말의 향연이라고 평가절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모여 뚝딱 만들어내는 문서가 아니라, 각 권리 항목에 담긴 의미를 되짚어보고, 차별과 인권침해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한 문장 한 문장에 인권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면, 새로운 인권 선언문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선언‘운동’이 될 수 있다. 여기서는 그동안 인권운동이 시도한 다양한 인권선언 활동을 소개하며, 그 당시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선언’은 계속 선언되어야 한다

 

촛불 행동 속에서 탄생한, 2008 인권선언3)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된 지 60년이 되던 해, 한국 사회는 이명박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되던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 수입 문제에 항의하는 수많은 시민이 광장으로 나와 촛불을 들었다. 시민의 주체는 다양했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은 거리에서 토론하고 행진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위기 속에서 인권운동은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인권선언’을 새롭게 재창조해냈다.

 

<2008 인권선언>은 세계인권선언문의 구성과 비슷하게 닮아있지만, 촛불이 타올랐던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며 연대와 저항을 주요 가치로 삼았다. “촛불의 직접행동을 저항과 연대의 상징”으로 보았고, “어떤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보편적 권리를 누리기 위해 연대하고 저항한다는 다짐”을 전문에 담았다. 또 하나의 특징은 문서를 만들고 끝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의 시각에서 권리를 구체화한 다양한 인권선언들을 릴레이로 발표했다는 점이다. ‘환자권리선언, 이주노동자권리선언, 장애인 인권선언, 성소수자 인권선언, HIV/AIDS 감염인 인권선언’ 등 조금은 낯선 인권선언의 목록들을 촛불이 있는 거리에서 외쳤다는 사실이 큰 의미로 남는다.

 

 

‘선언’은 계속 선언되어야 한다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4)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304명이라는 소중한 생명을 앗아갔다는 사실 그 자체가 믿기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큰 재난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응은 완전히 실패했고, 10년이 된 지금까지도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월호 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재난 참사가 발생하고 나서 생명과 안전의 가치가 이윤에 밀리고, 진실이 축소 은폐되고 있음을 목도하며 인권운동은 ‘4·16 인권선언운동’을 제안했다. 약 1년 동안 100회 정도의 풀뿌리 토론을 진행했고, 1,100여 명이 참여하여 860여 개의 권리들이 도출되었다. 세월호 참사가 시민 각자에게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또한 어떤 권리가 박탈되었는지 확인하며 2015년 12월10일을 맞아 4·16 인권선언문을을 발표했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라고 시작한 전문은 세계인권선언문에서 강조한 인간의 존엄성이야말로 ‘안전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제1조에서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언급하며 이는 최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하고, 돈이나 권력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보다 앞설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문을 참고하되, 세월호 참사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한 문구였다. 그 외에도 피해자들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책임과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에 대한 강조,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점 또한 4·16 인권선언에 담겨있다. 이 선언 역시 시민들이 각 조항을 낭독하며 영상에 남기는 활동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선언’은 계속 선언되어야 한다

 

더 다양한 권리 항목이 ‘선언’되어야 한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세계인권선언문이 탄생한 것처럼, 이후 새롭게 재탄생한 인권선언들을 통해 그 시대의 산물이 무엇인지, 중요하게 여긴 인권의 가치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2008 인권선언>을 통해 촛불 행동이 저항과 연대의 상징임을, <4.16 인권선언>을 통해 생명과 존엄의 가치가 돈과 권력보다 중요한 가치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이 선언에 녹아 있었고, 무엇보다 선언의 의미가 말 잔치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점 또한 알 수 있었다.

 

인권은 계속 선언되어야 한다. 이는 세계인권선언문이 완성형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아직 발견되지 못한 차별과 담지 못한 권리가 무엇인지 찾고, 수정하고 보완하며 새로운 인권선언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75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인권선언문은 모든 인권선언의 기초가 되고 있다. 많은 한계가 있다고 평가받지만, 동시에 인권의 가치를 알리는 표본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않아야 한다.

 

1) 세계인권선언 75주년을 맞아 UN이 추진하고 있는 활동에 대해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un.org/en/observances/human-rights-day
2) 매년 발표되는 인권의식실태조사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https://nshrc.kr/
3) <2008 인권선언>은 인권아카이브(http://www.hrarchive.or.kr/)에서 전문을 볼 수 있다.
4)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은 인권아카이브(http://www.hrarchive.or.kr/)에서 전문을 볼 수 있다.

 

 

글. 정민석((인권재단 사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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