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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톺아보기 [2023.11~12] [특집 좌담] 2023년, 다시 깊게 읽는 세계인권선언

 

1948년, 온 세계 사람들의 약속 아래 탄생한 세계인권선언은 이후 사회·경제·정치 등 다방면에서 보편적 가치의 기준이 되었다. 수많은 국제 인권 규범을 탄생시킨 세계인권선언의 가치를 어떻게 하면 2023년 오늘날에 더욱 잘 활용할 수 있을까? 서로의 현장에서 인권의 지평을 넓혀온 조효제 교수, 배경내 상임활동가와 함께 세계인권선언이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방향도 모색해봤다. <편집자 주>

 

조효제(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사진 왼쪽부터 :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사회자 이성택(국가인권위원회 인권교육운영과장), 조효제(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사진 왼쪽부터 :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사회자 이성택(국가인권위원회 인권교육운영과장), 조효제(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사회자  안녕하세요. 두 분 반갑습니다. 먼저, 세계인권선언이 어떻게 지금의 위치까지 오게 됐는지, 당시 인권활동가들은 인권 개념을 어떻게 한국 사회에 알리기 시작했는지 이야기해 주시죠.

 

  제가 1998년에 인권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규약들이 거의 유일한 인권 자료였어요. 인권의 프리즘으로 한국사회를 재해석하게 도와준 뜨거운 문서였죠. 2008년에는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자’는 슬로건으로 장애인, 청소년,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 각 분야별로 세계인권선언을 다시 써서 발표하는 선언 운동이 있었어요. 세계인권선언을 지금 이 땅에 구체화하는 순간이었죠. 그 후로는 인권 논의도 더 활발해지고 한국적 쟁점도 많아져서인지 세계인권선언의 존재감이 조금씩 옅어진 느낌이에요.

 

  말씀하신대로 세계인권선언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각 조항, 그리고 사회권이나 자유권 규약에서 확장되고 심화되는 과정으로서의 문서가 될 수 있고요. 또 하나는 세계인권선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필요한 사회적 고통을 인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촉매제 같은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요.

 

 

선언 제28조, 제29조, 제30조는 일종의 사용설명서

 

사회자  세계인권선언은 끊임없이 재해석될 필요가 있겠네요. 그런데, 최근에는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 중요성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도 드는데요.

 

  선언의 3조에서 27조까지에 포함된 권리 조항들은 모든 것을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텅 빈 기표 같은 느낌이에요. 그래서 선언이 말하는 ‘모든 인간’의 구체적 얼굴을 드러내거나 권리 내용을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국제인권규범이 발전해왔습니다. 저는 개별 권리 조항보다 전문(前文)이 여전히 큰 의미를 지녔다고 봐요. 보편성, 상호의존성과 같은 인권의 원칙을 이해하는 바탕이 되니까요. 선언의 28, 29, 30조는 상대적으로 조명되지 못했는데요. 권리가 보편적으로 보장되는 체제를 만들기 위해 어떤 권리들이 더 등장해야 하는지, 의존과 책임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는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았어요. 인권에 대한 백래시 과정에서 인권이 개인의 이기적 권리를 주장한다, 책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주장들이 등장하는데 부분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죠.

 

  저도 배경내 활동가님과 생각의 결이 비슷한데요.

 

세계인권선언은 본문인 3~27조만큼이나 전문이 주는 울림이 큽니다. 전문과 1, 2조까지가 세계인권선언의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28, 29, 30조는 제품으로 친다면 일종의 사용설명서입니다. 사용설명서를 읽고 전자제품을 사용하는 것처럼 28, 29, 30조를 잘 숙지한 상태에서 개별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맞다는 거죠. 저는 백래시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건설적인 측면도 준다고 봐요.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줘야 하는 치열한 야전병원에서 환자들의 목숨을 건져야 하는데, 의대에서 기초 학문을 연구하는 것처럼 접근할 수는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인권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그런 부분을 치고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야전병원을 운영하더라도 어떤 점은 아무리 급해도 기본은 기억하면서 응급 환자를 돌봐야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에 응급 환자를 치료하는 데 있어서 급하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것을 놓친 게 있다면, 앞으로 어떻게 대응하는 편이 현명할지를 우리에게 리마인드 시켜주는 요인으로 백래시를 활용될 수 있다고 봐요.

 

 

조효제

 

‘고슴도치형 인권’ vs ‘사슴 떼 인권’

 

사회자  현재 인권에 가해지는 백래시를 해석하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인권이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경우에도 깔끔하게 정리가 되고 모든 사람들이 100% 동의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라고 봐요. 어떤 쪽에서 보면 항상 문제나 불만이 남을 수밖에 없다고 보시면 좋겠어요. 그런 이유로 인권이 지금까지 이렇게 커진 거죠. 아까 활동가님이 28조를 거론하신 것이 너무 반가운데요. 그런 점을 도외시하고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적으로 개인의 작은 권리 위주로만 인권을 이해하는 것은 조심해야겠지요. 비유하자면 인권은 ‘고슴도치형’ 인권의 측면과, 함께 어울려 사는 ‘사슴 떼’의 인권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를 찌르면 나도 너를 찌를거야, 나에게 간섭하고 건드리지마’ 라는 형태의 고슴도치형 인권은 철저하게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요. 공동체 형태의 사슴 떼는 인권 침해에 대항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연대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거죠. 근데 이 고슴도치형 인권관이 지나치게 커져버리지 않았나 싶어요. 우리가 원래 생각했던 억압에 대항하는 인간의 해방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치게 개별화된 측면이 있는 거죠. 지금부터라도 이런 이야기를 자꾸 함으로써 인권에 대한 오해를 풀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28조에 나오는 질서는 시스템을 뜻합니다. 사회적 질서는 국가 내에서 민주주의와 복지를 말하고, 국제적 질서는 국가 간 평화와 협력을 말합니다. 그러한 시스템이 있을 때 개별 권리와 자유도 좋아질 수 있다는 의미이지요. 그러나 28조에서 강조한 전체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이 사라지고 개인에게만 포커스를 맞춘 인권담론이 지난 몇 십년 간 굉장이 커졌습니다. 저는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인권 담론도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담론이기 때문에 개인의 합리적 선택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패러다임 앞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러면 개인은 자신의 권리를 조금만 침해받아도 화내고 불편함을 못 참으면서도, 거시적 시스템의 문제에는 관심이 적어지는 겁니다.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많지만 인권 담론에 엄청나게 큰 폐해를 끼친 점도 꼭 지적하고 싶어요.

 

  너무 공감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책임져 주는 공동체에 대한 경험이 없을 때 타인에 대해서도 냉담해지게 되는 것 같아요.

 

 

배경내

 

인권에 대한 후속교육이 부족한 현실

 

사회자  그러면 지난 시기 인권 담론이 학교 현장에 부정적 효과를 준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해볼 수 있을까요?

 

  인권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학교현장에 존재하기는 해요. 하나는 자기보다 못한 존재를 배려하는 게 인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잘못된 장애이해교육의 폐해죠. 소수를 위해 희생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다 보니 인권에 대한 반감도 존재하고요. 또 하나는 교수님이 말씀하신 고슴도치 형 인권 개념으로 인권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인권을 처음 접한 사람들이 고슴도치가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데 문제는 상호의존에 대한 감각을 깨우는 후속과정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공교육의 책임이죠. 교사들의 경우에는 인권보다는 교권 개념에 더 기대는 경향이 여전합니다. ‘학생의 학습권은 인권이고 교사의 직권으로서의 교육권보다 우선한다.’ 이렇게 국가인권위도 인권운동도 이야기하죠. 그런데 교사는 인간이자 교육노동자로서 학생들과 상호작용해요. 교사의 인권과 직권으로서의 교육권이 교육의 장면 장면에는 얽혀 있어요. 교사들이 겪는 이 혼란을 충분히 헤아리면서 교사의 존엄한 노동과 학생의 인권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떤 조정이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데, 아직 이 부분이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사회자  스스로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나름의 생각이 있지만 민감한 주제여서 말을 꺼내기 어렵다는 말씀인가요?

 

  에너지의 문제 같아요. 다수의 교사는 어떤 시스템이 필요한지 주장하기보다는 당장 교실 안에서 다수의 학생을 어떻게 잘 통제하면서 교직 생활을 이어갈까에 에너지가 쏠려 있죠. 그러다 보니 청소년 운동은 또 교권 개념에 대항해서 학생 인권을 방어하는 데 집중했고요. 그래서 정작 중요한 이야기가 진척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인권담론은 왜 동반 성장하지 못했나

 

사회자  그러면 다시 정리해볼게요. 오늘의 논점은 ‘세계인권선언 전문과 1,2조, 28,29,30조를 다시 읽자’인데요. 대한민국의 인권 역사 30년에서 조효제 교수님이 말씀하신 파생적 오류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어떤 부분을 좀 고민을 해봐야 하는지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대표적인 오류가 인권의 보장 책임을 시스템의 끝부분에 있는 행위자에게 한정해서 이야기하는 경향이죠. 학생인권 보장의 책임 주체를 교사로만 상정한다거나 거주인의 인권을 얘기할 때 사회복지사가 이렇게 행동하면 인권침해라는 식으로만 알려준다거나. 그 결과 시스템의 책임이 가려지고 교사나 사회복지사들이 인권을 자신을 공격하는 언어로 받아들이게 되기도 했고요. 학생 인권 담론이 성장하는 동안 교사 인권 담론은 왜 동반 성장하지 못했는지, 장애인 인권 담론이 성장하는 동안 사회복지사 인권 담론은 왜 동반 성장하지 못했는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와 같은 법언도 사실 사법적인 인식이 깔려 있는 격언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만 정의관념을 추구하면 시간이 걸리는 문제에 대해 너무 크게 실망하고 상처입을 수도 있습니다. 인권 문제가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는 것처럼 바로바로 해결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도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역사적으로 길게 실현되는 인권도 많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인권이라고 하는 것을 당대의 발전에만 국한해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권 발전은 이어달리기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배 세대가 노력한 바탕 위에 서서 다음 단계를 부르짖는 것이고, 우리 다음 세대는 우리가 노력한 바탕 위에 서서 그 다음 단계를 부르짖고 있을 겁니다.

 

  인권교육이 교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얼마 전에 서울시가 위안부 기억의 터를 철거했잖아요. 작가 중 하나가 성폭력 가해자라는 게 이유라면 ‘위안부 문제에는 공감하는 작가가 당대의 여성에게는 왜 성폭력을 저질렀을까’를 돌아보면서 그 사람의 이름만 삭제하고 그 이유를 별도로 표기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기억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나요?

 

 

사회자 이성택

 

인권은 자각과 성찰을 요구한다

 

사회자  결국 인권 담론이 쌓아 올린 기초가 있고, 그 밑으로 퇴행하진 않는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지금은 어렵지만 앞으론 잘 될거야’ 라고만 한다면 현재의 동력이 부족할 수 있어 보입니다. 현재 활동이 어떤 의의를 갖는지 과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듯합니다. ‘과거와의 연대’라고 부를 수 있겠죠.

 

  사람들이 인권을 자신이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알아야 할 개념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고 봐요. 인권의 역사를 돌아보면 피해자성에 대한 자각과 가해자성에 대한 성찰이 결합되었을 때 의미 있는 사회적 연대와 결과물이 만들어졌거든요. 재난 피해자나 산업재해 피해자 유가족들이 폭력의 구조를 외면하며 살았던 ‘나도 가해자’라는 고백을 시작으로 같은 피해자를 더는 만들지 않기 위해 운동에 나서잖아요. 내가 여성으로서는 피해자이지만 비장애인으로서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성찰이 중요합니다.

 

 

세계인권선언, 끊임없이 보완하고 늘려나가야

 

사회자  마무리는 국가인권위원회로 해보고 싶은데요. 오늘 많은 이야기가 나왔는데, 인권위가 업무 방향성을 어떻게 가져야 될지에 대한 조언도 부탁드립니다.

 

  인권은 필연적으로 도구로서의 역할이 있는 것 같아요. 인권을 통해 급한 불을 끄는 소나기의 역할을 하는 거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실행 체계이고 각종 법제도가 있는 거죠. 그런데 저는 이것과 함께 가치를 지향하는 방향성도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도로서의 인권도 분명히 필요하지만 나침반으로서의 인권도 필요해요. 인권위가 상세한 지도를 만드는 식의 인권만 생각하지 말고, 북극성을 가리키는 방향성을 큰 틀에서 계속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인권교육에서도 도구적 인권 개념보다는 인권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을 더 깊이 다루어야 할 것 같아요. 노동인권교육이 근로기준법은 이야기하지만 존엄한 노동은 다루지 못하는 한계를 넘어서야죠. 개개인의 권리보다는 상호의존을 중심으로 인권교육의 내용도 강화되어야 합니다.

 

  세계인권선언의 3조에서 27조까지는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고 변화될 수 있어요. 그 당시에는 상당한 내용이었지만, 지금의 눈으로 보면 부족하고 한계가 많아요. 하지만 지금 얼마든지 보완할 수 있고 늘려 나갈 의무가 있어요. 제가 보기에 전문과 1,2조, 28,29,30조는 시대를 초월해서 계속해서 곱씹을만한 조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권」

 

조효제, 배경내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런던 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옥스퍼드 대학교 비교사회학 석사, 런던 정경대학교(LSE) 사회정책학 박사이며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인권 펠로, 베를린 자유대학교 DAAD-STAR 초빙교수, 코스타리카 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국제 앰네스티 자문위원,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준비기획단 위원, 법무부 정책위원, 서울시 인권위원을 지냈다.
편·저서로 『인권의 문법』, 『조효제 교수의 인권오디세이』, 『인권을 찾아서』, 『인권의 풍경』, 『인권의 문법』, 『Contemporary South Korean Society』 등이 있고, 번역서로 『거대한 역설』, 『세계인권선언』,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세계인권사상사』, 『인권의 대전환』,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머튼의 평화론』 등이 있다.

배경내
대한민국의 인권 운동가이자 인권교육가, 작가이다. 현재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 《인권, 교문을 넘다》, 《십 대 밑바닥 노동》 등을 저술했다.
세월호 참사에 관한 구술 기록집 《금요일엔 돌아오렴》,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집필한 작가기록단의 일원이다.

 

 

진행. 「인권」 편집부 두드림
사진. 전재천(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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