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돋보기 [2023.09~10] 교실이, 교사가 아프다
2023년 여름, 서울 한 초등학교의 저 연차 선생님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 죽음을 두고 과도한 학생인권, 추락한 교권, 학생 보호자의 악성 민원 등 그 책임을 묻는 수많은 논의가 이어졌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떠나 지켜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래서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다. 최근 학교를 둘러싼 여러 가지 사건들, 그리고 그에 관한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는 가운데 내가 말을 덧대는 것 자체가 사족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단순히 교권이냐 학생 인권이냐의 문제를 떠나 ‘학교’에 대해 고민할 공간을 열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삼스럽지만, 학교에서부터 시작해보자.
학교의 발명, 학교는 무엇을 가르치는 곳인가?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제1항의 문구는 이제 공기처럼 우리 삶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교육을 받을 권리’가 당연해진 것은 근대 국가 이후에서야 가능해진 일이다. 근대 국가의 탄생 이후, 국가의 가장 주요한 역할은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되었고, 그것을 위한 대표적인 약속이 바로 ‘헌법’이다. 그래서 우리 헌법에도 ‘세계인권선언문’ 제26조 제1항에서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천명한 것처럼, 국민의 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며, 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국가 기구가 바로 ‘학교’이다.
대한민국에서 학교는 무엇을 가르치는 곳일까? 압축적으로 빠르게 변화하며 성장해 온 경제만큼이나 학교가 받아 온 요구 또한 단순하지 않았다. 전쟁 이후 우리나라에서 교육은 개인적으로는 가난의 고리를 깰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주요한 수단이었다. 국가적으로는 급격하게 산업의 형태를 바꾸면서 이를 수행할 많은 인력이 필요했고, 학교는 인력을 양성하길 기대받았다. 그러다 민주화 이후로는 ‘민주주의’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 교육이라는 점이 부각되면서, 교육의 목적을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교육기본법 제2조)으로 삼게 되었다. 그 후 최근까지 민주시민의 자질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면서 다양성과 관련된 학생자치, 인권, 노동, 페미니즘, 생태 등 많은 개념들이 직간접적으로 학교에서 다뤄졌다. 그럼에도 사회의 굵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늘 학교는 무엇을 가르쳤느냐고 소환되었고 결국 학교는 안전과 학교폭력, 아동학대 등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받아들여 왔다.
교권, 있거나 혹은 없거나
사실 ‘교권’이라는 말은 사전적 정의도, 법적인 정의도 모호한 말이다. 해외에서도 ‘교권’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용어를 찾기 힘들다. 예를 들어 ‘교사의 노동권’, ‘교사의 교육권’ 처럼 구체적으로 교사의 권리나 권한을 명시하는 편이다. 반면 국내에서는 교사의 ‘권위’, ‘권리’, ‘권한’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용어로서 ‘교권’을 사용해 왔다. 문제는 그렇다보니 저마다 ‘교권’을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거나 오용한다. 그러다 인권의 가치가 사회 전반에 스며들면서 지자체 단위의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명제는 명확했지만,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교육 현장에서 학생 인권을 교사의 ‘권위’ 내지 ‘권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교권’이라는 말이 마치 ‘학생인권’과 대립되는 용어처럼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이러한 흐름이 ‘학생인권조례’로 대변되는 ‘학생인권’에 대한 지나친 강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학생인권조례의 어떤 부분이 최근의 문제를 가져왔는지 말하는 이는 드물다.
사실 대화가 아니라 법적 절차를 무기로 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학교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특히 ‘감정노동’의 문제처럼 ‘서비스’를 받는 ‘소비자’가 자신의 불만을 폭력적이거나 과도하게 집요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행태가 줄곧 문제가 되어왔다. 최근의 몇몇 학생의 보호자들이 학교를 대하는 방식 또한 이와 놀랍게 닮아 있다. ‘교육 소비자’로 대변되는 학생의 보호자가 서비스의 공급자로 여기는 ‘교사’에게 불만을 쏟아내는 행태는 결국 학교의 본질에 대한 고민 결여와 전문가로서 교사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혼합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학교가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되고, 교사가 그 서비스의 ‘공급자’가 되면서 학교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논리적으로는 소비자인 학생의 보호자가 학교에게 자신이 바라는 바를 요구하고 불만을 제기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사는 학생 보호자의 ‘니즈’에 맞춰 교육을 제공해야 하는 객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중 과도한 ‘고객’(교육 수요자-보호자)의 ‘요구’에 흔들리는 교실과 학교를 목도하게 된다.
진짜 교권을 이야기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학생 보호자에 의한 과도한 민원이나 통제가 어려운 교실 상황의 해결책으로 교사의 노동권과 같은 인권보장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학교는 국민의 교육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고, 교사는 그 일을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공인이다. 그러므로 결국 학교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교사는 그를 위한 어떠한 직무권한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논의를 시작해야만 교사의 노동권도 이야기할 수 있다. 쉬운 예를 들면, 우리 사회는 국민의 생명권과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소방관이라는 공무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만약 소방관에게 충분한 장비나 물을 제공하지 않고 무작정 화재를 진압하라고 한다면 정당한 일일까? 이와 같은 장면을 교실에 대입해 보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알 수 있다. ‘교육과정 대강화’란 국가는 학생이 배워야 할 큰 줄기만 정하고, 그 구체적인 부분은 교사가 설계하여 가르치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 교육은 반대로 교육과정을 지나치게 세분화하고 있어 교사의 교육과정 설계 권한을 상당히 제약하고 있다. ‘공정성’이란 명목 하에 평가권에 대한 제약은 더욱 심해서 교사의 평가권을 존중하여 교사 단위의 과목별 개별 시험을 치르는 해외의 교육 선진국과는 달리 여전히 학년 단위의 일제 고사의 방식으로 평가를 치르고 있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은 교사의 가르침에 집중하기보다는 시험 자체를 대비하기 쉬운 사교육(학원)에 의존하게 되고, 수능 중심의 입시 체제는 이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또한 교실에서 어떤 학생이 다른 학생의 수업권을 침해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이것을 교사 개인의 ‘역량’만으로 접근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기 십상이다. 실제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순간에도 보호자가 거부하면 교사의 직권으로는 관련 전문가나 기관과의 연계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령에서 교사의 권한을 명시한 부분은, “교사는 법령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학생을 교육한다”(초·중등교육법 제20조 제4항) 와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고 교원의 교육활동을 위하여 법령과 학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학생을 지도할 수 있다”(동법 제20조의2) 정도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미국이나 영국 등 해외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교사의 권리나 권한 등을 법이나 지침 등을 통해서 보장·보호하려고 노력하고 있다.1)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교육
몇 년 전 교실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했다고 하여 혐오 공격을 당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사례가 있었다. 수많은 인권 단체들이 선생님과 연대하여 혐오 세력과 싸웠고, 해당 교육이 헌법이 보장하는 ‘정당한 교육’이며 교사에게는 교육내용을 설계하고 가르칠 권리 내지 권한이 있다고 옹호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대화를 시작하면 어떨까? 교사가 가르쳐야 할 토씨 하나까지 국가가 간섭하는 순간 전체주의 교육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부분을 교육 전문가인 ‘교사’를 믿고 위임한다. 아동인권협약의 내용처럼 학교를 포함한 이 사회의 모든 공간에서 ‘아동 최선의 이익’은 응당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학교에서 인권을 침해받고 있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학생인권조례의 가치를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공교육을 시장의 논리로 재단하며 교사를 한낱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급자’ 정도로만 여기는 순간 우리 교실에서 희망을 찾긴 힘들다. 이제라도 학교의 본질을 지키기 위하여 교사에게 어떤 권한이 필요한지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 권한은 당연히 학생의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여야 한다. 그리고 그 권한이 남용되지 않도록, 학생의 보호자가 이에 대해 소통할 수 있는 공식적인 창구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는 것 또한 잊지 않아야 한다.
1) 예를 들어, 미국 캘리포니아 교원 협회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학생을 2일간 교실로부터 떼어 놓을(정학시킬) 수 있는 권리, ‘학생의 성적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을 할 권리, ‘학부모가 교실을 방문하기 전에 합리적인 기간 이전에 통지받을 권리’, ‘수업이나 학교활동을 방해한 학부모는 경범죄의 형사책임을 진다’등을 열거하고 있다.
글. 박종훈(변호사, 전 서울특별시교육청 학생인권교육센터 사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