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2016.05] 오월 광주, 그 기억의 회복
임종진 외 7명

다시 오월이다.
5ㆍ18민주화운동이 어느새 36주년을 맞이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이 땅의 지축을 흔드는 사회적 현안에 밀려 '오월 광주'는 어느새 망각의 저편에 건너가 있음을 무겁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지난 시간 동안 수많은 이가 '오월 광주'의 의미를 해석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준 일 또한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3년째 매주 광주를 오가면서 5·18 고문피해자들과 함께 사진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사진 행위를 통해 자신의 내적 상처와 대면하면서 회피와 외면의 주체를 털어내는 것이 주목적이었고, 그들은 힘겨운 시간을 이겨내면서 작게나마 스스로 건네는 위안의 힘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과정에 참여한 '오월 광주' 피해 당사자 일곱 분이 하나의 장을 마련했다.
<5·18민주화운동 36주년 기념'기억의 회복'오월광주치유사진전>
5월 16일부터 23일까지 서울시청 지하 시민청 갤러리에서 열리는 사진전의 제목이다.
모두 100여 점의 사진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이미지 자체보다는 자신의 트라우마와 어떻게 대면하면서 쓰라린 상흔을 덜어내어 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핵심이다. 작품으로서의 의미라기보다는 이미지 안에 드리워진 자기 정체성의 회복이라는 감정의 흐름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을 보살피고 존재적 가치를 회복하려는 5·18 고문피해자 일곱 분을 이 지면에 소개한다.

곽희성 1959년 12월생.
1980년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머리에 총을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가는 고등학생을 차에 실고 기독병원까지 수송하면서 제발 살아만 달라며 기도한 기억을 아프게 가지고 있다. 주기적으로 악몽을 꾸는 등 지금도 수많은 희생자에 비해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자책감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5·18 자유공원 상무대 영창.
세월에 억눌린 분노는 쇠창살 같은 억압과 구속의 표상들을 찾아 헤맸고 그 강제적 실체들과의 조우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흔들렸던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박갑수 1953년 5월생.
1980년 당시 직장이던 동아제재소에서 총무를 맡고 있었다. 계엄군의 지나친 진압작전에 분개하고는 사장 몰래 제재소 마당에 학생들을 불러 모은 뒤 직원들을 시켜 시위에 쓸 각목을 잘라 나눠주었다. 계엄군들의 구타와 당시의 격렬했던 상황 탓에 울분을 억눌러 생긴 불면증과 더불어 외상에 따른 신체적 고통을 겪고 있다.
충장로 5가 80-번지 동아제재소 자리.
왠지 가고 싶지 않던 곳. 맨손으로 싸우는 학생들을 위해 각목을 잘라주던 그곳을 30여 년 만에 찾아갔다. 13년이나 일한 직장이건만 건물은 이미 허물어졌고 주차장으로 쓰이는 마당만 그날의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서정열 1962년 6월생.
1980년 당시 고등학생 신분으로 도청을 사수하는 시민군으로 활동했다. 항쟁 기간 막바지에 빠져나와 광주 시내 자취방에 머물다가 집에 들이닥친 계엄군에 의해 체포되어 31사단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이후 군 입대를 했으나 전두환에 대한 울분을 감당 못하는 정신적 공황에 빠져 결국 의가사 제대를 했다.
고등학교 시절 체포되었던 광주시 매곡동 자취방
10여 년만에 다시 찾은 자취방은 폐허가 된 채 방치된 상태였고 자신을 아끼던 주인 아주머니도 돌아가신 지 오래였다. 함께 잡힌 친구 중에는 이미 죽어 5`18묘역에 묻힌 이도 있다.

양동남 1961년 1월생.
1980년 5월 당시 재수생 신분으로 가톨릭센터 앞 리어커에 실려 있기고에서 총을 가져와서 남광주 역전 사거리에서 총을 배부하고 기동타격대로 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에게 체포되어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모진 고문으로 심한 부상을 당해 국군통합병원에 후송, 70일간 입원 치료 받았으며 이후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국군통합병원 자신의 병상이 있던 자리
폐허가 된 채 사람의 흔적 하나 없는 이 공간에서 처절하게 무너졌던 당시의 자존감을 떠올렸다. 그때는 면회도 허락되지 않았기에 병상 창가에서 자신을 애타게 찾는 부친을 보며 좌절하기도 했다. 93세였던 할머니는 "저 아그가 차가운 디있는디 내가 어케 따순 밥을 먹겠냐"고 하셨다는 얘기를 나중에야 듣기도 했다.

이무헌 1957년 5월생.
1980년 당시 26세의 나이로 시민군에 참여했다. 29일 검거되어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구속 수감되었으며 1981년 4월 3일 석방되었으나 1개월 만에 나주화약고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 1984년 5월 구 도청 앞 분수대에서 진상 규명을 외치며 분신을 시도해 온몸에 화상을 입었고 2년여 입원 치료를 했으나 아직도 완치되지 않았다. 이후 정신적 내상에 대한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한 뒤 올해 초 11년 만에 퇴원해 현재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5ㆍ18자유공원 영창.
진실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
곤봉과 군홧발에 온몸이 짓이겨져도, 날아오는 총알이 두려워도 피하지 않고 맞서 버티고 매달렸다. 원하는 것은 진실 하나뿐이었고 그래서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끝까지.

이성전 1949년 9월생.
1980년 당시 32세로 시민들이 공수부대원들에게 구타당하는 것을 보고 울분을 느껴 투쟁에 합류했다. 7월 1일 연행되어 화순경찰서에서 한 달여 동안 하루 대여섯 차례씩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후 505보안대, 상무대 영창 등을 돌며 거의 날마다 지속적인 고문을 당했다. 재판 뒤 12년형을 구형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1981년 4월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현재 고문에 의한 뇌졸중으로 반신마비. 당뇨, 백내장, 전립선염 등의 고통을 받고 있다.
505 보안대 고문실.
36년째 멈추지 않는 좌절과 고통의 시간이다.
가정조차 팽개치고 오로지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민주화 투쟁의 대열에 나서야만 했다.
내게 물을 먹이고 사지를 비틀어대던 그들이 있던 자리에 서서 내 부서진 몸이라도 벌떡 일으켜보려 했다.
이행용 1954년 7월생.
당시 운영 중인 석재 공장에 계엄군이 주둔한 것에 분노해 시민군에 합류했다. 27일 이후 일상생활로 돌아가서 생활하다가 수배된 것을 알게 되어 몇 년에 걸쳐 도피 생활을 했다. 이후 체포된 뒤 총을 내놓으라며 60여 일 동안 고문을 받고 풀려났으며 물과 고춧가루 고문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현재 5·18 사적지를 관리하는 일에 큰 의미를 두고 있으며 우울증 등 내적 상처로 인한 고통을 여전히 안고 있다.
5ㆍ18자유공원 고문실
그들은 높고 나는 낮았다.
높은 하늘은 한없이 푸르렀고 트럭 바닥은 매섭게 시리고 차가웠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 바닥이 아니어야 했다.
짓밟히고 무너져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어야만 했다.
어느 누구도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