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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인을 만나다 [2024.03~04] 남성 중심의 마을 자치 제도에 맞서다

 

진정인 김두규 씨

 

“진정인을 만나다” 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여 기본적 권리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60년간 마을 이장 선거에서 남성만을 선출해 온 관행에 용기 있게 문제를 제기한 김두규 씨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진정인 김두규 씨

 

어느 날 김두규 씨가 살고 있는 마을 땅의 일부가 도로에 수용되면서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끼리 보상금을 동일하게 나누지 않고, ‘100년 이상 거주한 가구’를 기준으로 차등 지급하기로 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저희 부모님이 그 마을에서 80년 가까이 살아오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게 된 거죠.” 김두규 씨는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이유를 알고자 했다. “마을 회의에서 정했다는 것만 알았지 그렇게 정한 이유를 아무도 몰라요.”

 

 

마을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다

 

처음에 그는 100년이라는 기준이 합리적인지 문제를 제기했지만, 점차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을회관에는 거실을 중심으로 좌우에 남성, 여성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요. 마을 회의는 남성들만 모인 방에서 다수결로 이루어지고요. 40명 남짓한 마을에 여성이 30명, 남성이 10명 정도인데, 주축이 되는 소수 남성의 주도로 이장 후보를 추천하고, 그들이 마을의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한 거죠.”

 

그는 소수의 남성이 주도하여 보상금 지급 기준을 마음대로 정하는 성차별 관행을 바꿔야겠다고 마음먹고, 인권위 문을 두드린다. 통상 행정기관에 민원을 접수하면 며칠 후 혹은 몇 달 이내에는 회신이 오기 때문에, 진정 접수 이후 차별 판단도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마을 사람들의 비난 섞인 눈초리를 감수하고 용기 내어 진정을 냈건만, 인권위에서는 조사 중이라는 답변이 계속됐다. “한두 달이면 결론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실제 권고 결정까지는 1년 넘는 시간이 걸렸죠. 나중에 결정문을 받고 보니 조사관님이 고생을 많이 했더군요.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하나하나 다 들어본 거죠. 마을 남성들은 그런 일이 없다고 주장하고, 여성들은 해코지당할까 두려워 사실을 이야기하기 꺼리는 상황에서 그들을 설득하고 진술을 듣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거예요.”

 

 

소수의 남성에게 권력이 집중된 마을 자치 제도

 

인권위는 김두규 씨 사건을 각하했다. 그는 해당 마을에 거주하는 남성으로 ‘여성’ 차별의 당사자가 아니며, 조사를 원하는 다른 피해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다만 인권위는 이 사건의 내용이 성별을 이유로 한 간접차별1 소지가 있다고 보았다.

 

인권위는 정책 권고를 검토한 결과, 해당 마을이 이장 자격을 남성으로 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성 이장 비율이 현저하게 낮다는 점에서 이장 선출 및 임명 기준이 여성에게 차별적 영향과 효과가 있음이 통계적으로 확인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마을 군수와 행정안전부장관 등에게 지역 사회의 성차별적 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라고 권고했다.

 

진정인 김두규 씨

 

공동체 정신의 회복을 바라며

 

그는 지방소멸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소수의 남성에게 권력이 집중된 지금의 마을 자치 제도에 개선이 필요하다고 봤다.

 

“정년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온 사람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기존 주민들끼리 정보를 독점하고, 새로운 사람을 공동체에서 배제하고 차별하는 거죠.” 민속학자이기도 한 그는 사라진 공동체 정신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개발을 이유로 마을의 모습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어요.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만들고, 당산나무를 베어버리고, 축사를 지어요. 옛날 사람들이 나무를 꺾지 못하게 하고, 돌탑을 쌓는 등의 금기를 통해 지키려고 했던 공동체의 모습을 무너뜨리는 거죠. 과거의 물리적인 금기 행위들이 단순한 미신 행위는 아니었어요.” 그에게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다시 인권위에 진정할 것인지 물었다. “해야겠죠. 우리는 대부분 문제가 있어도 선뜻 나서지 않잖아요. 인권 침해나 차별이 있어도 그걸 문제라고 인지하지 못하고, 관행대로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요. 이번 일을 계기로 TV에 나오는 크고 심각한 문제만이 아니라, 내 삶의 작은 문제도 인권 침해고 차별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고 필요해요. 시골에 사는 노인들에게도 자신들의 권리가 무엇인지 알려 줄 기회가 있어야 해요.”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조사가 길어지는 동안에는 인권위가 이런 사소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거로 의심했어요. 하지만 인권위가 시골 마을의 작은 사건도 진지하게 다뤄준 덕분에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온 것 같아서 보람을 느껴요. 작은 일이지만 내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구나 싶은 마음에 자존감도 올라가고요.”

 

인권위 권고에도 불구하고, 김두규 씨 마을의 보상금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앞으로 있을 인권위의 실태조사2를 통해 자신의 마을뿐만 아니라 전체 지역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밝혔다. 다가오는 봄에는 모든 마을에서 평등한 회의가 개최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변화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1) 형식상으로는 제한·배제·분리·거부 등에 의하여 불리하게 대하지 아니하지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당사자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를 간접차별이라고 한다.
2) 인권위는 2023년 7월 말부터 전국 130개 기초지자체를 대상으로, 이장 선출 및 임명 과정에서의 성차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하고 있다.

 

 

글 | 박정현(국가인원위원회 홍보협력과)
사진 | 한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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