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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024.03~04] 기후위기로 인한 재해 “개인이 손쓸 방법이 없어요”

 

신향식 농민

 

봄이 오는 길목의 2월 하순,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의 한 농가를 찾았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볕은 따뜻했다. 봄이 오기 전 부지런히 봄을 기다리는 농민들의 바쁜 아침을 기자에게 내어준 이는 신향식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익산시 여성농민회장이다. 대전이 고향인 신 회장은 남편과 결혼하고 27년째 이 곳에서 살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 200평 가량 되는 하우스 20여 개 동에서 쌈채소와 멜론 농사를 지으며 가족과 주민과 함께하는 일상을 지켜가고 있다.

 

지난 2월 말 하우스에서 만난 신향식 회장.
지난 2월 말 하우스에서 만난 신향식 회장.

 

보통 하루 시작을 몇 시에 하시나요?

“7시면 해가 떠요. 같이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할 준비를 하죠. 작물에 따라 달라요.”

 

어떤 농사를 짓고 계십니까.

“멜론과 상추를 지어요. 올해 유럽 채소류도 심기 시작했는데 처음 해봐요.”

 

지금 심은 작물들은 언제 수확하나요?

“상추는 연중 생산하고 농산물 공판장과 인터넷으로 판매합니다. 멜론은 2월에 2번, 3월에 한 번 나눠서 심고 조합을 통해 납품하고 개인에게도 판매합니다. 모종 심은 것 자라고 출하 끝나면 이제 여름에 상추 심지요. 설 명절 전에 작업한 건 멜론 잘 자라라고 온도 유지를 하기 위해 땅에 전열선을 깔아준 거예요. 비닐 밑으로 전기선을 깔아요. 3명이서 비닐하우스 한 동 작업하는 데 2시간은 걸려요. 3월에 또 다시 손 봐야해요.”

 

 

올해 환갑이 된 신 회장은, 부모님을 따라 농업을 직업으로 선택한 둘째 아들(32살)을 포함해 세 아들을 낳았다. “내 사업”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농사 일만 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농산물 가격은 제 가격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힘이 든다”고 말했다.

 

 

신향식 회장이 자신이 키운 쌈채소밭 앞에 서 있다.
신향식 회장이 자신이 키운 쌈채소밭 앞에 서 있다.

 

기후위기 문제는 언제 처음 체감하셨나요.

“7년 전쯤으로 기억해요. 겨울이 따뜻했고 한 여름이 너무 더웠어요. 사계절이 없어졌지요. 겨울에는 난방이라도 해서 농사를 짓는데 여름 하우스 안은 정말 너무 더워요. 차광막을 90%는 가려야 열과 빛을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대부분의 작물이 타요. 하우스를 설치한 만큼 연중 농사를 짓고 작물을 심어서 수확을 해야 하는데 관리를 안 해주면 여름에 작물이 다 타죽어버리니까요. 전에는 일할때만 차광을 쳤는데 이제는 평상시에도 쳐야 해요. 농사짓는 데 씨앗이나 모종만 돈이 드는게 아니라 이제는 자재에도 돈을 많이 써야 해요.”

 

신향식 회장이 하우스 위에 두른 차광막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향식 회장이 하우스 위에 두른 차광막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빛과 열을 가리려면 어떤 식으로 하시나요.

“30%, 50%, 90% 이런 식으로 빛을 가리는 비율이 달라지는 막을 팔아요. 여름이 더 뜨거워지니까 열을 막아야 하는데, 또 빛을 다 가리면 또 작물이 해를 못 보니까요. 햇빛은 투과되게 하고 뜨거운 열은 막아주는 식으로 차광막을 달리 깔고 또 관리도 자주 해주는 거죠.”

 

농사짓기 더 힘들어지셨나요.

“이 동네는 평야 지대라서 논농사나 하우스 농사를 많이 해요. 그래서 겨울에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아요. 다만 전기나 기름 사용이 많아지는 거죠. 우리 아들이나 젊은 농민들이 스마트팜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런데 전기가 없으면 안되는데 슬금슬금 요금이 오른다잖아요. 폭탄 맞는 기분이에요. 고령화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없으면 농촌은 일손이 너무 부족해요. 논농사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하우스 농사도 해야만 합니다. 기후변화와 고령화가 농촌에서는 제일 무섭습니다.”

 

 

27가구가 사는 이 동네에서 환갑인 신 회장이 가장 막내였다. 25~26년째 막내가 신 회장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 바뀌지 않았다. 농촌은 기후문제를 말하지 않아도 이미 한국 사회의 약한 고리였다. 노인들만 남은 농촌이 이상기후로 인한 피해를 입는다면 그 피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기후변화로 작물 재배 환경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멜론이나 상추뿐이 아니라 모든 작물이 기후에 영향을 받지요. 우리는 처음에 참외와 멜론을 하고 이 모작으로 벼를 심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하우스를 하면서 연중 농사를 계속 지어요. 쌀농사만 지으면 생활이 어려우니까 계속 일하는 거죠. 5월말에서 7월초까지 벼를 심는데 그때 하우스 작물들도 무럭무럭 자랄 때에요. 겨울에 노지에 심은 양파, 마늘, 대파를 그때쯤 수확하는데 이때 작물에 붙어 있던 해충도 벼나 하우스 작물에 들러붙는 거예요. 전에는 약을 치면 어느 정도 잡혔어요. 그런데 이제는 수도 늘었고, 어미로 성장하는 기간이 매우 짧아졌어요. 수백만개 알이 금방 깨고 금방 자라요. 약을 쳐도 감당이 안되는 거죠. 우리가 매일 먹는 상추라 약을 매일 칠 수도 없어요.”

 

봄철 냉해 피해를 입은 적은 없으세요?

“꽃봉오리 질 때 냉해 피해를 입으면 과일이 안맺혀요. 매실, 사과, 배나무 다 똑같아요. 정품 사과가 없다고 해요. 우박 맞고 수정이 안되고 또 전염병도 도니까. 그래서 앞으로는 예쁜 사과가 아니라 못난이 사과만 나올 수도 있다는 말도 해요. 마치 구제역이 돌아서 동물들 생매장 시키듯이 병이 돌면 나무도 뿌리채 뽑아서 태워버려야 해요.”

 

곤충들의 수정이 어려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들도 많다고 하던데 어떤가요?

“저희는 멜론을 재배하니까 바닥에 호르몬제를 사용해서 수정을 해요. 겨울에 하우스에서 심는 건 어차피 그때는 추워서 벌이 활동을 안 하니까 이렇게 하는 건데요. 과거에 봄에 재배할 때 벌을 양봉농가에서 빌려서 수정시켜봤어요. 그런데 너무 더우니까 벌들이 죽어버리더라고요. 4월 정도면 벌이 수정에 나서야 하는데 그게 잘 안돼요. 결국 약을 써야 해요. 게다가 벌통 안에 벌도 전보다 양이 절반 정도로 줄었어요. 벌도 이제는 잘 자라지 못하는 거죠.”

 

 

기후위기는 자연을 이미 변화시켰다. 변화된 자연이 농가를 점점 고립시키고 있었다. 자연의 많은 자원을 활용해 농업의 기초를 바꾸고 있다. 농업을 하면서 주변 환경을 바꾸며 적응해가던 인간에게 이상기후가 닥치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었다.

 

 

지난 해 재해가 있었는데, 피해가 크셨나요.

“수십 년 전에 동네에도 비가 엄청 쏟아진 적이 있다고 이웃 할머니에게서 들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다 잠긴 적은 처음이라고들 해요. 여기서 30~40분 떨어진 강경둑이 터져서 열흘 정도 하우스 꼭대기까지 물이 찼어요.”

 

 

온 국민이 기억하는 충북 오송 지하차도 참사가 났던 지난해 7월의 그 폭우였다. 신 회장과 주민들이 거주하는 이 지역은 금강 유역으로 둑이 터진다면 바로 물이 들어차는 지역이기도 했다. 평소에는 그 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렇게 비가 많이 온 적도 없기에 주민들은 대피해야만 했다.

 

 

당시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계속 흐린 날씨였어요. 우리 동네보다 더 피해가 컸던 인근 지역은 하류에요.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물이 빠져 나가야하는데 둑이 터진 거예요. 이 지역 시설 자체가 농배수로로 30년을 썼어요. 논농사를 주로 짓다 보니 배수로가 좁고 얕아요. 그런데 이제는 하우스에서 나오는 물도 많고 배수 시설도 좁으니까 이만한 비를 다 빼내기가 힘든 거예요. 물이 넘쳐서 들어왔어요. 그렇게 허벅지까지 물이 찬 거예요. 농작물만 잠기는 게 아니라 자재들도, 농약통도 다 떠내려갔죠. 수확한 상추를 포장한 박스 수백 개가 다 젖어 폐기했고 이 동네 일대가 다 그랬어요.”

 

물이 빠지고 어떻게 하셨나요.

“우리 하우스는 물이 빠지는 데 이틀 걸렸습니다. 우리는 여름이 대목이에요. 낼모레 딸 수박도 다 잠겼고요. 물을 먹지 않은 과일이라도 뿌리가 썩으면 못 먹어요. 보기에는 멀쩡한데도 손으로 쿡 누르면 쑥 들어가요.”

 

2023년 7월 중순 수해로 신향식 회장 가족의 하우스도 물에 잠겼다. 하우스 안도 쑥대밭이 됐다.
2023년 7월 중순 수해로 신향식 회장 가족의 하우스도 물에 잠겼다. 하우스 안도 쑥대밭이 됐다.
신향식 회장 제공

 

경제적 피해는 계산해 보셨나요.

“너무 마음이 아파서 따져보지도 않았어요. 상추 가격이 그때 한 박스(4kg)에 평균 7~8만원까지도 받았어요. 우리는 상추가 자라는 하우스 12동을 손도 못 대보고 물에 잠겼습니다. 지난해 5월에도 비가 한 번 와서 겨울에 키운 멜론 수확을 포기했는데 7월에 또 비가 와서 거의 다 떠내려갔죠. 바닥에 심으면 멜론 1200개, 막대를 세워서 심으면(지주재배) 1800개도 달리는 게 멜론이에요.”

 

하우스 주변은 어떻게 정리하셨나요.

“한 달 정도는 그냥 물 빠지는 걸 기다렸어요. 가봤자 발만 빠지니까. 군인 장병들이 와서 봉사해주고 그랬죠. 그런데 도움 받기도 어려웠어요. 비가 안 오면 덥잖아요. 하우스 안이 80도까지도 올라요. 개폐기를 작동해서 바람이 통하게 해도 40도는 돼요. 다 망가졌으니까 다시 설치를 해야하는데 손도 못대요. 상추는 그 자리에서만 썩지만 멜론은 썩은 채로 넝쿨에 달려 있어서 처리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이런 재난을 어떻게 극복하고 대책을 요구했나요.

“면에 대피소가 3곳 있었어요. 그동안 TV에서나 봤는데 처음 대피해 본 거예요. 음료수나 컵라면만 먹는데, 오래 계시니까 어르신들이 김치에 집밥 먹고 싶다고 하셔서 여성농민회에서 김치와 콩나물 요리해 가서 식사부터 하게 해드렸죠. 그리고 수해대책위원회를 만들었어요. 망성면 주민들이 익산시장을 찾아갔어요. 긴급 재난 상황이라면서 재난재해지역 선포 외에는 급하게 쓸 돈이 없다고 해서 화가 났죠. 야당 대표도 와서 한마디 하고 갔는데 그걸로 끝이었어요. 지역 3개면, 농민회, 여성농민회까지 3개 단체가 모여서 사후대책을 지금까지도 요구하고 있는 거죠.”

 

재해보험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요.

“국가 재난 지원금이 있었지만 큰 도움이 안됐어요. 재해보험은 절반은 국가 보조가 들어간다고 그걸로 하라고 하더라고요. 또 보험 안되는 건 피해 신고한 걸로 조금씩 받은 거죠. 위로금 정도라 농민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추석도 겨우 보냈고, 8~10월을 아무것도 없이 지냈어요.”

 

 

위로금뿐이었다. 재건하는 것은 결국 주민들의 몫이었다. 그나마 선의의 이웃들이 봉사에 나서준 것이 감사한 일이었다고 신 회장은 기억했다.

 

 

이사가거나 직업을 바꾸는 건 어려우시죠.

“조상들도 다 여기서 살았고, 지금 와서 농업을 하지 않으려면 요양보호사 일이나 식당 일을 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할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기후변화는 직격탄이에요.”

 

여성 농민으로서 기후위기 시대가 더 힘들게 느껴지는 게 있나요.

“하우스 안에서 여성 농민들은 수작업을 많이 해요. 남성들은 기계를 많이 쓰니까요. 인건비 차이가 있지요. 여성들은 남자들이 안하는 집안일도 하고 애도 키우면서 농사일까지 하잖아요. 점점 더 힘들어지죠.”

 

미래는 더 힘들어질 듯한데 농사 짓는 일에 어떤 지원이 필요할까?

“사람들은 결국 국가에서 하는 걸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이런 농사도 후퇴할 거예요. 스마트팜으로 변해갈 거예요. 저는 땅에서 농사지었으니 농산물로 보는데 나라에서는 공장으로 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 들어가는 시설비가 어마어마해요. 창업농 지원해준다고 하지만 젊은 애들이 농사도 모르고 옵니다. 나라에서 이들을 키우려고 불렀으니까 그 시설에서 농사 짓고 자립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줘야죠. 젊은이들이 농사 경험을 쌓고 자가 농사를 스스로 지을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어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는 2023년 11월 기후재난과 여성 농민의 삶에 대한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김정열 전여농경북연합 식량주권위원장은 “재해를 당하면 해결 과정에서 여성 농민이 직업을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갖고 돈을 버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 보니 비정규직과 임시직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전여농은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은 농민 개개인이 감당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정부가 기후재난보험제도를 더욱 보강하는 등 정부의 책임을 강화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상기후 속 농민의 삶, 또 여성 농민의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더욱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다.

 

 

글/사진 | 최우리(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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