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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음 [2019.09] 보름달처럼 환한 소통의 명절

글 김정기

 

가을이 깊어간다. 푸르고 맑은 하늘엔 순정함이 넘친다. 천진무구한 하늘에는 무엇이 있을까. 톡 톡 두드리면 어떤 소리가 날까. 지난여름 불볕더위가 사람과 대지를 뜨겁게 달궜을 때 첫사랑처럼 얼마나 가을의 바람을 기다렸던가. 정직한 자연이 어김없이 베푸는 가을이라는 선물을 견딜 수 없어 시인은 노래했을 것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서정주의 〈푸르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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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고향과 가족 공동체

지난 추석처럼 명절은 그리운 날이다. 가족 공동체 중심이 아니라 정치·경제·행정·기능·생산·소비 위주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현대사회에서 명절은 떨어져 살던 가족이 모이는 날이다. 그래서 2대 명절인 추석과 구정엔 고향집으로 향하는 행렬이 장사진을 이룬다. 교통 체증으로 평소 고향 가는 시간의 몇 배를 길 위에서 보내야 하는 비합리적인 행위가 너무나 당연하게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런 명절 세태는 많이 변했다. 변화를 극적으로 대변하는 것이 국민의 대다수가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라는 이유로 청와대에 제출된 ‘명절을 법으로 폐지하자’는 청원이다. 명절과 제례(祭禮)를 둘러싼 논쟁이 공론화를 요구하는 사건으로 대두된 것이다.
여성의 혹사, 여성의 일방적인 가사 부담, 시댁 위주의 풍습, 남녀 차별의 명절 문화가 부부 갈등을 일으키고 가정불화의 원인을 야기한다. 이후 명절이 지나면 이혼 신청이 평소보다 2.5배 이상 증가하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이니 명절의 가부장 문화의 폐해를 지적하는 비판에 동의하고 행동으로 개선하는 합리적인 명절 간소화 옹호론자들도 설 땅이 좁아져 눈치를 봐야 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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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을 대하는 다양한 변화

명절의 변화는 도도하다. 예를 들어 명절 연휴를 해외여행으로 대체하는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명절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나간 날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등의 ‘역대 최다 출국자 수’라는 보도가 해마다 되풀이된다. 공항 출국장에서 만난 어느 며느리는 “명절에는 대부분 일만 하잖아요. 그런데 가족들과 뜻깊게 여행 갈 수 있어서 기뻐요”라고 말하는 인터뷰가 보도의 단골로 등장한다. 이런 현상은 젊은이들에만 한정되지 않고 부모 세대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여론조사 기관에서는 달라진 명절 풍경과 세태를 통계 수치로 실증한다. 현재 진행형인 역사의 흐름이라는 게 중론이다.
물론 명절 풍경에는 부모님과 가족을 찾는 긴 귀성 행렬도 여전히 이어진다. 자녀들과 함께 선물과 음식 보따리를 들고 민족 대이동을 거행한다. 기나긴 고난의 시간을 도로 위에서 보내더라도 “부모님과 가족을 뵙는다는 마음으로 설레고 기쁘다”는 며느리, “한 해 중에서 아들, 손자손녀, 며느리를 만나는 이 날이 제일 기쁘다”는 나이든 부모님, “전을 부치고 가족들이 대화하고 정을 나누는 따뜻한 자리여서 헤어질 때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아들딸의 소회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명절은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다. 이는 명절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전통 가치의 쇠락과 동반되는 현상이다.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출산율, 고령화율과 함께 가장 급진적으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시대착오적 쇄국정책으로 국권을 빼앗긴 쓰라린 경험을 했으니 그 시대의 전통을 버리는 일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이 작동했을 수도 있다. 또한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대이동과 기존 질서의 붕괴에 따라 이질적인 사람과 가치의 이합집산도 전통의 가치를 약화시키고 새로운 가치를 수용해서 살게 되는 이유가 됐을 것이다. 남북한의 대치에 따른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삶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철학에 기반한 서구 교육의 도입도 한몫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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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 불통을 치유하는 의미있는 시간으로

그러나 명절은 무조건 버리기에는 아까운 전통이다. 물질은 풍족해지고 디지털 시대의 도래로 사람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더욱 편해졌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외로움과 고독, 소외감이 더욱 증가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명절은 ‘혼자가 아닌 나, 함께하는 가족 공동체’라는 좋은 가치를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기회다. 귀찮은 시간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명절 풍습을 합리적으로 간소화하고 노동 분담을 통해 좋은 전통의 가치를 발전시켜나갈 필요가 있다.
또한 명절은 물리적 만남만으로 끝나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라는 공동체의 가족들이 모여 못 만난 시간 동안 성장한 서로에 대해 얘기 나누고 논쟁도 하고 함께 놀고 깔깔거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민족 대이동의 수고를 거쳐 명절에 모인 대한민국의 가족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소통하고 이견을 확인한다. 여러 세대가 함께 모여 그리워할 추억을 쌓고 세상살이에 대한 용기를 얻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제는 이분법적인 찬성과 반대로 명절을 천덕꾸러기로 만들지 말고 유쾌하게 활용하는 데 애써보자. 가족 공동체의 각자는 개인으로서 차별적인 개성, 사정, 상황이 있다. 나이, 직업, 신분, 경제력 등에서도 형편이 다르다. 중요한 점은 이런 점을 배려하는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은 절대로 피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무심결에 뱉는, 상대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말은 두고두고 마음의 병으로 자리 잡게 하고 가족 공동체를 회피하는 원인이 된다. 나아가 여성을 불합리하게 대우하는 명절 문화와 과감히 단절하면서, 이 시대의 고질병이 돼 가고 있는 불통을 치유하는 소통의 시간으로 삼는 노력을 쏟아보자. 소통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어루만지고 감싸는 최고의 선물이다.
21세기 복지사회가 행복한 개인과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소통의 장으로서 명절의 역할은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발전시켜가야 할 현대적 가치다. 할머니·할아버지·어머니·아버지·딸·아들·손녀·손자·친지의 마음과 이야기가 교환, 반박, 공유, 이해되는 소통의 과정을 거치면서 배려의 가족 공동체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는 어떤 혁명적인 기술력이나 경제력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가치다. 행복한 가족은 다른 가족과 공동체의 행복도 소중하게 여길 테니 말이다.

 

김정기 님은 한양대학교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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