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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음 [2019.05] 다시 5·18민주화운동을 생각하며

글 노영기 / 사진 5·18기념재단

 

올해로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한 지 39년이 됐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신군부가 ‘폭동’, ‘내란’ 등으로 왜곡한 5·18이 대표적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유네스코에서도 5·18을 인류가 기억해야 할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관련 기록물을 인류의 기록 유산으로 등재했다. 5공정권이 막아 산을 넘어 찾아가던 망월동 묘지(구묘역)는 국립묘지(신묘역)로 조성되고, 5월 18일은 국가 추모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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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의 의의와 전개

대한민국 국민들 대다수는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8민주화운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도 인터넷에는 5·18민주화운동의 가치를 모욕하는 것들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다. 왜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했고, 그에 대한 왜곡과 폄훼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 광주 시민들이 신군부의 집권에 반대하며 발생했다. 1979년 ‘10·26’ 이후 유신독재는 무너지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잃어버린 자유와 민주주의가 되살아났다. 하지만 1979년 12월 12일 군사 반란을 일으킨 신군부는 권력 장악을 계획했다. 신군부는 ‘북괴 남침설’을 조장하며 1980년 5월 17일 밤 12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휴교령이 내려져 전국의 각 대학을 군이 점거했다. 군이 국민들의 정치·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빼앗았다.

이날 아침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의 폭력에 의해 해산된 학생들은 전남도청(현 아시아문화의 전당)이 자리한 금남로로 진출했다. 오전에는 경찰들이 시내에서 모인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오후에 학생들이 다시 금남로에 모이고, 이날 오후 4시경 공수부대원들이 광주 시내에 투입됐다. 그때부터 금남로를 비롯한 광주 시내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가 사라졌다. 고(故) 김경철은 귀가 들리지 않고 말도 못 하는 장애인으로 최초의 희생자였다. 그는 공수부대원들의 폭력으로 온몸에 상처를 안고 희생됐다. 다음날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서 시민들을 속옷만 입힌 채 기합을 줬다. 이 같은 폭력과 야만을 목격한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에 저항했다. 5월 20일 차량 시위가 발생하고 시민들은 공수부대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날 밤 광주역 앞에서는 공수부대가 집단 발포했다. 5월 21일 새벽 5시 무렵 광주역에서 두 구의 시신을 발견한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철수를 요구했다. 5월 21일 오후 1시를 전후해 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했고 많은 시민들이 쓰러졌다. 광주 시내의 병원에는 총상 환자들로 넘쳐났고, 이를 계기로 시민들은 광주와 인근 지역에서 무기를 꺼내 군에 대항했다. 이날 오후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해 광주를 봉쇄했다. 이제 광주는 ‘육지 속의 섬’으로 고립됐다. 군이 광주를 드나드는 사람과 차량에 발포해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광주 시민들은 공권력에 상처받은 공동체를 치유했다. 쓰러진 사람들을 위해 피를 뽑고 주먹밥을 만들고, 꺼내온 무기를 한데 모으며 질서와 치안을 유지했다. 부족하지만 함께 나누며 군의 봉쇄를 견뎌냈다.

한편 시민들은 군과 협상해 평화로운 사태 해결을 모색했다. 군은 시민들에게 무기 반납만 요구했다. 5월 27일 새벽, 어둠을 틈타 광주 시내에 침투한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건물의 시민들을 제압하며 5·18민주화운동은 일단락됐다.

 

군인의 임무와 책임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를 진압하던 공수부대원들은 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의 군인들이었다. 그렇기에 상관의 명령에 충실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행동은 군인으로서의 임무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난 것이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5·18 기간인 5월 19~21일에 여성들에 대한 총 17건의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군의 여성들이 군인들에 의해 성폭력의 피해를 당했다. 피해자 대다수는 총으로 생명을 위협받으며 군복을 입은 군인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했고, 지금까지도 그 피해자들은 제대로 치유받지 못한 채 그 사건으로부터 얻은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다. 이들뿐만 아니라 연행·구금된 여성 피해자도 수사 과정에서 성 고문을 비롯한 각종 폭력 행위에 노출됐으며,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여학생, 임산부 등을 대상으로 한 성추행 등 여성 인권 침해 행위도 다수 있었음이 밝혀졌다.

공수부대원들의 폭력적이며 야만적인 시위 진압 그리고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사건 등은 당시 광주 시민들을 ‘적’으로 간주하던 공수부대원들의 의식이 외부로 표출된 결과다.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군인들이 되레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했다. 39년 전의 일이었으나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산더미처럼 남아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조사돼야 할 이유다.

하지만 일부 공수부대 출신들을 제외하고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제대로 증언한다고 보기 힘들 것 같다. 많은 자료와 시민들의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과 부인으로 일관한다. 때문에 5·18민주화운동 관련된 핵심 주제들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시민들뿐 아니라 군경에서도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들 중에는 시민들과의 충돌에서 발생한 희생도 있으나 군의 오인사격에 의해 희생된 경우도 있다. 정부와 군에서는 이들을 일괄적으로 ‘국가유공자’로 처리했다. 그러나 시민과 국민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진압과 총격을 했던 ‘충정작전’이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위에서 내려진 임무와 명령에 충실한 군인들로서 대우한다고 할지라도 남는 문제가 있다.

1980년 5월 24일 하루에 두 차례의 오인사격이 있었다. 오전과 오후에 걸쳐 발생했다. 군의 오인사격로 인해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한 점도 안타깝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날 오인사격으로 인해 사망한 군인들의 죽음이 조작됐다. 이들의 사망 원인은 ‘폭도(시민들을 가리킴. 인용자)’들의 총격에 의한 ‘전사(戰死)’로 기술됐다. 이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시민들과는 전혀 관련 없는 사건이었음에도 시민들이 습격한 것으로 왜곡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시민들을 폭도로 간주하던 군의 인식이 그대로 반영됐다. ‘전사(戰死)’라는 표현이다. 사망 원인이 조작되고 이것은 사망자들의 공적을 바꿨다. 즉 ‘충정작전’에 참가해 시민들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조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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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5·18민주화운동

5·18민주화운동은 공권력의 폭력과 야만에 맞서 자신과 이웃들의 생존과 인권을 지키려는 의로운 저항이었다. 또한 유신독재에 이어 군부 통치를 연장하려던 신군부에 맞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지키려던 저항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은 인권과 민주주의가 왜 소중한가를 일깨워준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 같은 가치들이 군에 의해 짓눌려졌다. 공수부대로 대표되는 군의 행위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행동이었다. 국민들의 시위를 폭력과 야만의 행태로 진압했다. 누구에게나 무자비한 폭력이 휘둘러졌고, 결국에는 집단 발포와 조준사격으로 이어졌다. 1980년 5월 27일에 공수부대원들만이 광주 시내에 진입하지 않았다. 탱크 18대를 앞세운 보병이 뒤따르고, 이와 함께 헬기도 광주 시내로 들어와 발포했다. 군이 국민들을 상대로 전투를 치른 셈이다. 당시에는 이 땅에서 다시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무섭고 두려운 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주의를 되찾으려 노력했다. 그 명칭이 변할 만큼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아직도 5·18민주화운동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처럼 쌓여 있다. 그날 국민들을 향해 발포하라고 명령한 자는 아직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음으로 분명 5·18민주화운동 기간에 사라진 사람들은 가족들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누구나 궁금해하는 문제들은 지금도 5·18민주화운동이 끝나지 않았음을 일깨워준다. 다음으로 5·18민주화운동을 모독하는 행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8년 진상 규명을 위한 법률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음에도 아직껏 위원회가 구성되지 못하고 있다. 진상 규명의 첫 단추를 꿰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어둠 속에 덮어지지 않으며 언제가 다시 되살아난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5·18민주화운동도 그러했다.

 

 

노영기 님은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자유전공학부 교수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및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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