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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역사 이음 [2019.03]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글 한준호

 

이상룡은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만들어 나라의 주인이 백성임을 밝혔으며, 1911년 만주로 망명하기 전에는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웠다. 또 1923년에는 「자유도설(自由圖說)」을 통해 “자유의 반대는 노예이니, 자유를 완전히 보존하고자 한다면 우선 노예의 습관을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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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룡, 재조명되다

100년 전인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하나 돼 전 세계에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3·1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27년 동안 나라 밖 중국에서 쉼 없이 투쟁했다. 그렇게 수많은 인물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많은 국민들이 3·1운동 하면 ‘유관순’, 대한민국 임시정부하면 ‘백범 김구’를 떠올린다. 그리고 요즘 재조명되고 있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다.

2017년 8월 15일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 문재인 대통령은 임청각을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상징하는 공간”이라 했다. 그리고 올해 2월에는 ‘나의 독립 영웅’으로 이상룡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임청각이 다시 주목받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임청각을 방문하고 있다.

 

안동 임청각에서 태어나다

이상룡은 1858년 경북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臨淸閣)에서 이승목(李承穆)과 안동 권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동 시내의 낙동강 변에 자리한 임청각은 500년 역사를 지닌 고성 이씨 종택으로, 1519년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이 건립했다.

보물 제182호인 임청각의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지으리[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라는 시구에서 ‘임(臨)’자와 ‘청(淸)’자를 취했다. 그리고 정자군자정(君子亭)은 목조 건물로는 보기 드물게 임진왜란을 겪었다. 군자정 대청에는 이현보(李賢輔) 등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으며, 임청각이라는 현판은 퇴계 이황(李滉)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에 이상룡을 포함해 모두 11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동생 이상동과 이봉희,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조카 이형국·이운형·이광민, 종숙 이승화, 부인 김우락과 손부 허은이다. 그 가운데 아들 이준형(李濬衡)은 대한협회 안동지회 사무책임자로 활동했고, 1911년 만주로 망명한 후 경학사, 한족회, 서로군정서, 정의부에 참여했으며, 1923년에는 한족노동당을 창립한 후 간부로 활약했다.

그러다 그는 1932년 고향 안동으로 돌아와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1942년에 국운을 비관하며 자결했다. 손자 이병화(李炳華)는 만주에서 대한통의부, 한족노동당, 고려공산청년회 간부로 활동했다. 특히 함께 만주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내조한 여성들의 공로도 있다.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 이들 앞에는 삼중의 무거운 과제가 놓여 있었다. 우선은 1세대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며 자신의 뜻을 다잡는 것이 큰 과제였다. 또 하나는 시시각각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생활 현장에서 가족들의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했다. 거기에다 함께 간 어린 자녀들을 민족 앞에 쓸 좋은 인재로 길러내야 했다. 이러한 과제 앞에 임청각 여성들은 추호도 뜻을 꺾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삶을 헤쳐 나갔다.
임청각 사람들이 2~3세대를 이어 오랜 시간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이끌어갈 수 있었던 바탕에는 바로 여성들이 있었다.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끌다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이상룡은 차성충 등과 함께 경남 가야산을 근거지로 의병전쟁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 기밀이 들통 나 거금 들여 키운 의병이 무너지자, 새로운 돌파구로 서양 사상을 수용하고 애국계몽운동으로 전환했다. 이상룡은 제대로 된 교육과 단체만이 국권을 지키는 길이라 생각했고 1909년 5월 5일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다. 안동지회는 서양의 근대사상과 제도를 받아들여 민주주의를 지방 차원에서 훈련하는 것에 목표를 뒀다. 그는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실천 방안을 찾았다. 다시 말해 국가와 국민의 개념, 국민과 국가의 관계, 국민의 의무, 국체 정체에 대한 고찰 속에서 정치사회사상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1910년 8월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안동의 유림들은 단식과 자결로 항거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 일제를 물리칠 힘을 기를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선 인물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사가 바로 이상룡이었다. 그는 1911년 1월 가족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했다. 떠나기 전 사당의 신주(神主: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고,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웠으며, 시 「거국음(去國吟)」을 지었는데, 이는 만주로 망명하는 뜻을 밝히면서 나라를 되찾는 날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기약한 것이다.

이상룡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의 기반이 될 한인자치단체(경학사·부민단·한족회)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와 백서농장(白西農庄)·길남장(吉南庄)·서로군정서 등을 세워 무장항일투쟁을 이끌었다. 또한 광업사(廣業社)·자신계(自新?) 등을 조직해 동포사회의 농업 및 실업 활성화를 도모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쉽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만주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쏟던 1912~1913년 두해에 걸쳐 흉년이 거듭됐고, 이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이 가중되자 이상룡은 고향에 있는 재산을 팔기로 결정했다. 1913년 봄 그는 아들 이준형을 보내 400년된 종택(宗宅) 임청각과 대지 및 인근 산판(山坂)을 매매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이후 일제가 호적제를 시행했으나 이상룡과 아들·손자 등은 일제 치하의 호적 등록을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임청각의 소유권은 고성이씨 집안의 여러 구성원 명의로 등기됐고, 2000년대 초부터 68명의 관계자를 추적해 동의를 받아낸 끝에 2010년 8월 4일 소유권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청각은 기존 등기가 말소된 상태여서 현재 미등기 건물, 즉 무허가 건축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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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①임청각 사랑채 / ②이상룡이 순국한 곳, 길림성(서란시 소과전자촌 마을 전경)

 

순국 6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다

1925년 9월 이상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추대됐다. 그는 임시정부를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세우기 위해 만주 3부(정의부·신민부·참의부)의 요인을 망라하고 출신지를 골고루 헤아려 조각(組閣)을 추진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위한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6년 봄 그는 국무령 직책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만주로 간 69세의 이상룡은 끝까지 투쟁을 이어갔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상황에서도 의연히 학교를 이끌며 청년들에게 애국사상을 심어주던 그는 1932년 5월 12일 7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광복이 되기 전까지 유해를 조국으로 가져가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던 이상룡은 1990년에야 그토록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고, 지금은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돼 있다. 그의 삶은 역사 앞에 떳떳한 인간의 참다운 의지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이상룡은 안동의 대표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나아갈 길을 고민하고 시대 과제를 해결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만주로 망명해 굳센 의지와 희망으로 동포들을 이끌며 무장 항일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근대사의 큰 과제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해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은 이 두 가지 과제를 풀어나간 역사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 된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여전히 분단이라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이 과제 앞에서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모두의 책임이니, 죽기를 각오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이상룡의 외침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또한 다양한 생각과 이념을 수렴해 적절한 길로 나아가고자 한 그의 탄력적인 모습 또한 우리가 품어야 할 태도일 것이다.

 

 

한준호 님은 현재 경북 안동에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책임연구사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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