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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리고 지금 [2018.06] 여름, ‘6월’의 흔적을 걷다

글 이지선 사진 봉재석

 

다시 6월이다. 한 해의 여섯 번째 달, 1년의 복판에 선 6월은 기상학적으로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때이고 신화적 의미에서 젊음을 뜻하는 달이기도 하다. 한국 역사 속에서도 6월은 여름이자 젊음이었다. 민주주의라는 꽃을 피우고자 했던 수많은 젊음을 떠올리게 하는 달, 서울 시내에 남은 6·10민주항쟁, ‘6월의 흔적’을 따라가봤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서울시청 앞 광장입니다.

 

 

청년이 쓰러진 자리, 연세대학교 정문

 

1987년 6월을 기억할 때 많은 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진이 있다.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고개를 떨군 채 피를 흘리며 동료 학생의 품에 안겨 있던 청년 이한열의 모습. 6월의 흔적을 되짚는 길, 시작이 연세대학교 정문이어야 하는 이유다.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별칭답게 유난히 격동이 심했던 한국 현대사 속에서 1987년 6월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시민의 승리. 4·19혁명, 5·18광주민주화 운동과 함께 한국 민주주의의 변곡점이 된 거대한 사건이었다. 물론 이 거대한 변곡점이 6월이 되자 갑작스럽게 툭 튀어 온 것은 아니다. 변화는 이미 오래전 시작되어 있었다.


1987년 1월. 새해가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문 사회면 구석에 한 대학생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사망한 이의 이름은 박종철. 고문 끝에 사망한 그의 소식은 전 사회를 술렁이게 했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발표에 사람들은 실소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4월, 전두환 정권은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 유지’를 골자로 하는 4·13호헌조치를 발표한다. 격랑과도 같았던 1987년 6월은 그렇게 다가왔다.


전두환 정부의 호헌 시도에 맞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는 6월 10일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전국의 대학에서 전날인 9일 사전 집회가 열렸다. 연세대학교도 예외는 아니었고, 사람이 모이면 경찰부터 출동하던 시절답게 연세대학교 정문 앞은 밖으로 진출하려는 학생들과 이를 막기 위해 최루탄을 쏘는 경찰들이 엉켜 아비규환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사람이 쓰러졌다. 이한열이다.


깔끔하게 정돈된 지금의 풍경은 흘러간 세월만큼 달라 보이지만, 1987년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연세대학교 정문 진입로는 민주주의를 향해 흘렸던 핏물의 흔적 그 자체였다.

 

‘87체제’ 태동한 공간, 명동성당

 

비단 6·10민주항쟁뿐만이 아니겠으나,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되짚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간은 명동성당이다. 1987년 6월 10일,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시민들은 경찰의 폭력적 진압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피신한다. 10일 밤, 성당 구내에 모였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시위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서자 경찰은 모든 길을 차단하고 최루탄을 난사했다. 성당 구내로 퇴각한 시위대는 대학생 500명, 노동자 26명, 도시빈민 농성자 80명, 일반 시민 150명으로 집계됐다(1).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뜨겁던 시절, 명동성당은 종종 피난처이자 해방구가 되곤 했다. 1987년 6월도 다르지 않았다. 그때 명동성당 앞마당은 군부 독재 아래 있던 시민들의 해방구였다. 시위대 체포를 위해 성당 앞마당에 발을 들이려던 경찰들은 서울교구청 사제와 수녀들에 의해 저지되었고, 시위대는 성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전했다. 시민들은 성당 안에 발이 묶인 시위대에게 먹을 것과 성금을 지원했고, 근처의 여고에선 점심 도시락을 걷어 시위대에 전하기도 했다.

 

시위대는 15일 오전까지 명동성당에 머물렀고, 김수환 추기경과 함세웅 신부의 노력에 힘입어 단 한 명도 구속되지 않은 채 성당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때 그 자리에 여전히 우뚝 서 있는 명동성당에는 이제 건물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거나 종교 활동을 지속하려는 이들이 가득하다. 너른 앞마당은 그저 평화롭다.

(1) ‘실록 민주화운동 83. 명동성당 농성’, 경향신문, 2004.12.26.

 

뜨거웠던 순간이 남은 자리

 

4·19, 5·18이 그러하듯, 6·10 또한 단 하루에 벌어진 단일한 사건이 아니었다. 10일의 국민대회를 시작으로 29일까지 20일간 이어진 지속적인 항쟁이었고, 그에 따라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던 공간 역시 한두 곳이 아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전국의 거의 모든 거리가 정권과의 대립각을 세웠던 시민들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서울 중심적이라는 한계가 명백하지만, 그해 가장 뜨거웠던 때를 기억하며 찾아가 볼 만한 곳이 더 있다.

 

당초 국본이 도모했던 국민대회 장소는 서울시의회 옆에 자리한 대한성공회 대성당이었다. 전두환 정권과 여당인 민정당이 노태우 당시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며 잠실체육관을 들썩이게 하던 시각, 대성당의 종루에서는 42번의 종이 울렸다. 해방 이후 42년 ‘민주주의의 새날을 열자’는 의미였다고 한다. 선언문이 낭독되었고, 이 소리는 근방의 시청과 명동까지 울렸다고 전해진다. 대한성공회 대성당의 사제관 앞에는 지금도 그때를 기념한 기념비가 남아 6월 항쟁의 진원지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탑골공원과 시청 앞 광장 역시 빠뜨릴 수 없는 공간이다. 시민들의 단골 집결지이자 시위 현장이었던 그곳 역시 오늘날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감회 어린 공간일 테다. 특히 시청 앞 광장은 6월 항쟁의 마지막 집회가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7월 9일, 항쟁이 지속되는 동안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사투를 벌이다가 숨을 거둔 청년 이한열의 운구행렬이 들러간 그곳에는 약 백만에 달하는 시민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운구차가 빠져나간 뒤 자연스럽게 남아 연좌 집회를 이어갔고 마침내 일어나 광화문 네거리로 방향을 틀었을 때 경찰들이 쏘아대는 최루탄 연기를 마시며 흩어졌다. 6월 항쟁은 이후 7, 8, 9월의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지지만 시민들은 6월의 어느 날처럼 모여들지 않았다.


시청광장은 지금도 많은 이가 자유를, 평등을 혹은 생존권을 건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때마다 찾는 곳이다. 최루탄이 사라진 이후 최루액과 물대포의 기억이 새겨지기도 했고 소수자들의 가시화를 위한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어쩌면 올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시 파릇한 잔디 위로 햇살이 내리쬔다. 바야흐로 여름이, 6월이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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