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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리고 지금 [2018.02] 수많은 박종철을 기억하며

취재 정별님 / 사진 봉재석

 

1987년 1월, 서울대 재학생이던 박종철 열사가 경찰 조사를 받다가 고문 끝에 숨졌다. 당시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허위 조사 결과를 발표해 단순 쇼크사로 위장하려 했다.
국가가 간첩 등 반국가 사범 색출이라는 이유로 일반인들에게 고문을 자행하던 곳,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현재 경찰청인권센터로 탈바꿈한 이곳에는 30여 년 전 박종철 열사가 고문 받던 509호 조사실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고 박종철 열사를 추모하는 글

 

대공분실에서 인권센터로 바뀐 내부  

 

잔인한 고문이 자행되었던 곳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기,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민주화 운동 인사에 대한 고문이 자행되었다. 24시간 내내 피의자를 감시할 수 있는 취조실에서는 변호인 접견권 등 기본적인 권리도 지켜지지 않은 채 가혹한 고문이 이어졌다. 2012년 개봉한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영동1985>를 보면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김근태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지금으로선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당시만 해도 비일비재했다.

 

이근안은 ‘지옥에서 온 장의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잔인한 고문 방법을 사용했다. 손발에 호일을 감아 전류를 흘려 보내거나 얼굴에 천을 덮고 물을 부어 숨을 못 쉬게 하는 등이었다. 강제로 물을 먹인 뒤 배 위를 눌러 역류하게 만드는 방법처럼 그가 개발한 고문 방식만 수십 가지가 넘는다. 그는 잔인하고 혹독한 방식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내곤 했는데, 당시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차라리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게 낫다”고 할 정도였다. 이들 대부분은 대공분실에서 풀려난 뒤에도 수십 년간 정신적·육체적 후유증을 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잔학한 방식의 고문이 이뤄졌던 남영동 대공분실은 지도상에 주소만 나와 있을 정도로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다. 경찰청 보안3과로 분류돼 사용되긴 했지만 다른 보안분실이 그렇듯 ‘○○해양 연구소’라는 위장 명칭이 붙어 있었다. 소속경찰관들 또한 정식 계급이 아닌 계장님, 사장님 등의 호칭으로 불렸다.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밖에서 보면 그저 평범한 회사원, 사무실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후일담이지만 ‘이근안이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악명을 떨쳤던 이근안은 독재 정권이 무너진 이후 10년 10개월간 도피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불법 고문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오랜 기간 버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하자 자수하기에 이른다. 이후 2000년 불법감금 및 독직가혹행위죄로 기소돼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여주교도소에서 복역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고 박종철이 참고인 진술을 명목으로 연행된 뒤 고문 끝에 사망한 사건 때문이다. 그는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폭행과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하다 숨졌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고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변명을 내놓았고, 이를 들은 많은 사람들은 분노했다. 해당 사건은 당시 부검의였던 오연상이 물고문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사인을 기자에게 알리면서 시작됐는데, 정부의 사건 축소·은폐 시도 중 서울영등포구치소 보안계장 안유의 폭로로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 사건은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미사를 통해 공표되었고 이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고 박종철 열사가 고문받다 사망한 방

 

“공포를 위해 철저하게 계산된 공간”
남영동 대공분실은 처음부터 치안 및 방첩의 용도로 지어졌다. 1976년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김치열이 발주했으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설계됐다. 김치열은 일제강점기에 검사로 부임한 이래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서울지검장, 중앙정보부 차장, 검찰총장,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 등 권력의 핵심부로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남영동 대공분실 정문 앞 기둥에는 ‘內務部長官 金致烈(내무부장관 김치열)’이라고 쓰여 있는 초석이 있다.

 

 

 

   

대공분실이 있는 대지 8,363㎡(2,530평)에는 본관 7층을 포함해 별관과 부속 건물, 테니스 코트 등이 있었다. 영화 <남영동1985>나 최근에 개봉한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에서 연출한 고문실은 본관 5층에 존재한다. 이곳은 사람 둘이 간신히 들어가는 승강기나 층수를 알 수 없는 원형 계단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데, 전문가들은 이러한 공간적인 제약이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심리적 장치로 활용되었다고 해석한다. “공포를 위해 철저히 계산된 공간”이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많다.
5층에 다다르면 복도 양쪽으로 방들이 쭉 배치돼 있다. 불조차 제대로 켜지지 않아 어두운 데다 모든 문이 똑같이 만들어져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또한 마주보는 방들은 서로 엇갈리게 배치돼 문이 열려도 건너편 방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면 머리조차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좁고 긴 세로 창과 철제 가구가 위치했다. 조명이며 집기류는 모두 바닥에 고정시켜 끌려온 사람이 자살하는 것을 막았다. 창이 좁은 것도 같은 이유인데, 세상과 단절된 느낌을 극대화시켜 피해자가 자백하고 싶도록 만들었다. 이들은 이 방으로 끌려와 간신히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취조 시간을 견뎠을 것이다.

 

보존된 고 박종철 열사의 조사실
취조실로 발을 옮기면 해당 건물은 고문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고문실은 비명이 새나가지 않도록 목재 흡음제로 벽을 만들었다. 일반적인 흡음제는 내부의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사용하는데, 목재로 만든 타공판은 오히려 옆방에서 고문을 받는 피해자의 비명 소리가 전달되게 만든 것이다. 다음 수사를 기다리는 피해자에게 옆방의 고문 소리는 또 하나의 끔찍한 고문이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창 쪽에는 허리 높이의 세면대와 변기가 있는데, 반대편에는 폐쇄회로 카메라가 설치돼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존엄성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어둡고 폐쇄적인 공간을 바라보고 있으면 당시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곳은 현재 경찰청 인권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고 박종철 열사가 고문받던 5층 9호실은 1987년 당시 모습으로 복원되어 공개 중이다. 박종철 열사를 고문하는 데 사용했던 욕조를 비롯해 변기, 침대와 가구는 물론 방 한편에는 열사의 영정사진도 볼 수 있다. 인권센터는 박종철 열사의 유품은 물론 1980년대 당시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과 언론보도 자료가 전시된 박종철기념관도 함께 운영해 과거 폭정의 심각함과 민주주의 소중함을 상기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지난 1월 14일, 서울시는 박종철 열사의 31주기를 맞아 남영동 대공분실 앞마당에 바닥 동판을 설치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설치된 동판은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역삼각형 형태이며 근현대 흐름 속에서 벌어졌던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과 이에 저항했던 생생한 역사의 현장 임을 나타내고 있다.02

 

 한 학생이 당시의 사진을 스마트폰을 찍고 있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당하던 조사실에서 현장 검증하는 국회의원들

 

 화면해설.

이 글에는 지금은 인권센터로 바뀐 남영돋 대공분실에 방문객들이 남긴 추모의 글과, 사진이 전시된 내부, 고 박종철 열사가 고문받다 사망한 559호 조사실, 서울대학교 기와 하얀 국화꽃바구니, 그리고 고문에 사용했던 욕조 등 조사실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사진.  1987년 6월 항쟁 당시 태극기를 들고 시위하는 사진을 한 학생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찍고 있는 모습. 박종철 열사가 사망한 509호 조사실에서 현장 검증을 하는 국회의원들 사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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