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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017.04] 봄기운까지 함께 비벼드릴게요

글 권오분

 

 용례할머니를 위한 봄나물 비빔밥
"봄기운까지 함께 비벼 드릴게요"

 

인권밥상-1

 

주재료 _ 꼬들하게 지은 쌀밥 | 냉이 | 쑥부쟁이 | 당근 | 콩나물 | 달걀
부재료 _ 소금 | 참기름 | 식용유 | 파 | 마늘

 

오래 전부터 밥을 함께한다는 것은 소통과 존중의 상징이었습니다. 인권을 지키는 것은 어떤 거창한 일이 아니라 소박하더라도 정성껏 차린 한끼 밥상을 나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땅에서 나는 흔한 제철 음식으로 푸근한 밥상을 차려서 혼자 대충 때우기 쉬운 분, 사회적 약자들을 찾아가 함께 나누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겨울이 춥고 길고, 세상의 이야기들은 겨울보다 더한 냉기로 가득 차더니 그래도 봄은 왔다.
계절 중에 가장 신비로운 시간이 바로 겨울 뒤에 오는 봄날의 사건들이다.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오는 봄날의 산나물, 들나물은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감격스럽기도 하지만 애처로울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봄날에 늘 바쁘다. 봄은 빨리 지나갈 것이고, 나물들은 어리고 연한 시기를 놓치면 먹을 수 없는 잡초가 되어 버리니 부지런히 나물을 뜯는 것이다. 혼자 먹기엔 너무 아까워서 이 집 저 집 나누기를 한다. 많이 뜯을 때도 적게 뜯을 때도 혼자 먹기엔 아쉽기 때문이다.
인권밥상을 차리자는 이야기를 듣고 제일 먼저 생각난 분은 멀리 동두천에서 홀로 사시는 용례할머니다. 남편은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시고, 자식들은 함께 살 형편이 못 되어 몇 년째 혼자 사시는 분이다.

 

용례할머니도 젊었을 때는 봄이 되면 산으로 들로 나물을 뜯으러 다니셨다. 할머니는 걸음이 빠르고 손이 야물어서 남보다 먼저 그득하게 나물바구니를 채웠다. 그런데 이제 여든이 넘고 다리가 불편해서 지팡이를 짚고도 움직이기 힘드신 분이다. 장애가 인정되어 요양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옛 시절이 그립다고 때때로 한숨 짓고 눈물도 글썽이신다. 이웃에게 음식 나누기를 행복으로 여길 만큼 활동적이시던 분이 자기가 먹을 음식도 만들어 먹질 못하니 흐르는 세월이 야속할 것이다.


인권밥상-3

 

용례할머니를 위한 오늘의 메뉴는 제철 봄나물 비빔밥이다. 비빔밥은 제철 나물을 사용할 수 있어서 계절에 상관없이 즐길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 음식 중에서 가장 손쉽게 조리할 수 있는 복합 영양제라고 생각해서 손님 맞이 음식으로도 자주 이용하고 있다. 나물을 뜯고 모자라는 나머지는 전통 시장에 들러 준비하면서 깊은 잠을 자고 나서 기지개를 하는 것 같은 개운함이 온몸에 느껴졌다. 나른한 봄기운에서 싱그럽게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우선 냉이는 다듬어서 소금물에 살짝 데치고 쑥부쟁이도 데쳐서 소금과 참기름으로만 무친다. 뿌리 채소인 당근은 색깔도 맞출 겸 비빔밥에 늘 빠뜨리지 않는다. 콩나물은 아삭한 식감이 좋고 영양의 균형과 색의 조화를 위해 자주 이용한다. 기름에 볶아야 흡수율이 높아지는 당근은 채 썰어서 볶고 콩나물은 데친 후 바로 찬물에 담가 아삭한 식감을 키운다. 모든 채소들을 소금으로만 간을 하는 것은 나물 하나 하나 본래의 향을 느끼게 함이고 만들기도 훨씬 쉽다. 비빔밥을 준비할 때는 잎채소와 줄기채소 뿌리채소들이 고루 들어가도록 생각하며 준비한다. 식물의 전체를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하니 늘 그 원칙을 잊지 않는다.

 

비빔밥의 장점은 셀 수 없이 많다. 고추장이나 양념 간장을 따로 준비하고 국도 한두 가지 챙기면 식성대로 비벼 먹을 수 있다. 다른 반찬이 필요 없고 여러 사람이 먹을 때도 힘이 덜 는 일품 요리다. 나물들을 색깔 맞춰 담으면 그냥 그대로가 그림이다. 흰자위와 노른자 색을 살려서 반숙한 달걀을 얹으면 너무 예뻐서 먹기도 까울 지경이다. 겨울을 이긴 힘을 몸에 섭취하면 일년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가는 음식이다.

 

인권밥상-4

 

'용례 할머니! 거동이 불편하시더라도 봄기운을 듬뿍 담은 나물밥 드시고 힘 내세요!' 그 힘으로 우울한 한숨 거둬 내시길 비는 마음으로 밥상을 린다. 이 아름다운 봄날에 누군가에게 그가 가장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대접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도 큰 행복이다. 그리고 축복이다.


잘 비빈 비빔밥을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어드리며 얘기했다.
"자리에 똥을 싸도 좋으니 오래오래 살아야 해요."
거짓말이 아닌 진심이다. 올해도 많이 웃으시고 한숨은 이제 그만...
세월은 그렇게 흘러 가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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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분 님은 수필가로 활동 중이며 한국자생식물보존회, 숲과 문화 연구회, 한국식물연구회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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