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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17.01] 가정 밖 청소년을 보는 새로운 시선

글. 안광복 그림. 이선희

 

가정 밖 청소년 

 

┃  스파르타는 왜 ‘혼밥’을 금지했을까?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에서는 ‘혼밥(혼자 먹는 밥)’을 법으로 막았다. 환자를 빼고는 모두가 함께 밥상에 앉아 식사를 해야 했다. 왜 스파르타는 밥을 함께 먹도록 했을까? 식구(食口)는 ‘먹는 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가족은 ‘밥상 공동체’라 할 만하다.


  홀로 밥 먹을 때는 남 신경 쓰지 않아서 편하다. 그만큼 다른 이들을 배려할 일도 없다. 다들 쫄쫄 굶고 있는 상황에서 나 혼자 고기반찬을 먹고 있어도 거리낌이 없다는 뜻이다. 눈치 볼 필요가 없는 탓이다. 반면, 모두가 함께 식사를 할 때는 어떨까? 퀭한 얼굴로 형편없는 찬거리를 끼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당당하게 홀로 진수성찬을 누릴 수 있을까? 철면피가 아닌 한, 좋은 먹거리를 주변 사람들과 나눌 수밖에 없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혼자 먹기 미안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심성은 원래 착하다. 그래서 어려운 이들을 보면 돕고 싶어진다. 이쯤 되면 왜 스파르타가 법으로 시민들이 공동식사를 하게끔 정했는지 이해될 듯싶다. 건강한 사회는 어렵고 힘든 이웃을 늘 곁에 두고 바라본다. 이러기에 ‘남의 눈이 무서워’ 사치를 줄이고, 딱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된다.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도 부담을 느끼기는 매한가지다. 늘 받기만 하는 처지가 마음 편할 리 없다. 노력해서 주변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끔 해야겠다며 이를 악물게 될 것이다.


┃  우리는 왜 가정 밖 청소년을 보지 못할까?


  이제 스파르타 ‘밥상 공동체’와 우리 사회를 견주어 보자. 우리는 과연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바라보고 있을까? 곳곳에서 솟구치는 아파트촌들은 ‘격리와 배제’의 상징이다. 집값이 내려간다며 어려운 이웃들을 단지에서 몰아내려는 모습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학부모들은 생활보장대상자가 많은 학교를 기피한다. 살만한 이들끼리 모여 자기들만의 세상을 꾸리며 살아가려는 모양새다. 이렇듯 우리 사회의 중산층 문화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은 자꾸만 변두리로 내몰려 한다. 이런 현실에서 ‘가정 밖 청소년’들이 배려 받을 곳은 어디일까?


  눈에서 멀어지면 관심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중산층 시민들의 가정 밖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은 추상적이다. “국가가 나서서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많다. 그러나 가정 밖 청소년들을 돕는 것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문제는 가정 밖 청소년들이 우리 주변에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1년에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아이들은 2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수치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조금만 주변을 돌아보면 부모 갈등, 가정 폭력, 경제적 문제 등으로 분란을 겪고 있는 집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그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못할까?


  대한민국은 ‘환상 공화국’에 가깝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평균적인 시민들의 삶을 떠올려 보라. 등장인물 대부분은 대학을 졸업하고 책상에 앉아 일을 한다. 자기 집에서 살고 있으며,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는 대부분 잘 갖추어진 원룸에서 산다. 우리는 화면 속에 그려지는 삶을 특별히 문제 삼지 않는다. 그 가운데, 은근히 ‘평균적인 대한민국 국민의 인생진도표’가 우리 머릿속에 자리를 잡는다. “청소년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야한다. 졸업 후에는 대기업 같은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고 서른 즈음에 결혼을 한다. 그리고 몇 년간 열심히 일해서 집을 장만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다….” 등으로 이어지는 삶의 예상 진도를 그린다는 뜻이다.

 

┃  표준이 아닌 표준 인생진도표


물론 세계인권선언에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인권선언은 그 자체가 강제성을 띠는 협약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선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또 68년 전의 시대가 가진 인권 문제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조항이기 때문에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미흡한 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2조의 차별 금지 항목 중엔 장애, 비장애, 성적 취향과 성 정체성, 나이 등 최근의 민감한 인권 문제의 항목들은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또한 선언문 내용 중간 중간에 남녀차별적인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질 당시의 시대적인 한계이지 세계인권선언이 추구하는 가치가 글자 그대로 제한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계인권선언은 인권에 대한 세계 모든 사람의 첫 외침이라는 면에서 그 의의가 사뭇 크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인권선언은 세계 인권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세계인권선언을 만든 이후로 인권에 대한 의식은 점점 더 높아졌고 그에 따라 인권의 영역은 더욱 더 많은 권리와 내용들로 확장되어 갔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인권선언 이후에 수많은 인권협약이 새롭게 제정되었고 선언에 제대로 담기지 못한 인권 문제들은 구체적인 국제인권협약 속에 포함되고 있다.

  68년이 지났지만 세계인권선언의 각 조항은 여전히 그 의미가 있다. 선언이 제기한 인권 문제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인류 모두의 과제이며 한국에서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세계인권선언은 우리 사회의 인권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척도실을 보여준다.


 

┃  인권의 도약 - ‘가출 청소년’에서 ‘가정 밖 청소년’으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너무도 유명한 김춘수의 〈꽃〉의 구절이다. 2017년 1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청소년복지지원법」에 나오는 ‘가출 청소년’이란 표현을 ‘가정 밖 청소년’으로 고치라고 권고하였다. 이는 청소년들의 인권 보호에 큰 변화를 일으킬 시도다. 이누이트(에스키모) 족들이 눈(雪)을 표현하는 낱말은 400개가 넘는다. 그쪽 어린이들은 흰색을 천 개까지 나누어 가려낸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진눈깨비, 함박눈 정도로만 구분될 뿐, 모든 눈이 다 비슷하게 보인다. 이렇듯 언어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섬세하게 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청소년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삶의 과정’은 이미 ‘정상’이 아니다. 대학이 인생 목표가 아닌 청소년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대학을 마쳤다 해도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혼한 가정도 크게 늘고 있으며 아예 결혼을 안 한 채 혼자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들을 부를 마땅한 용어가 없을 때, 이들은 모두 ‘비정상’인 관심 밖 존재들이었다. ‘비혼(非婚)족’, ‘나홀로족’, ‘돌씽’ 등의 신조어들은 이들의 존재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한 무리를 가리키는 용어가 생겨났다는 것은 그 집단이 비로소 ‘정상’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있다.


  ‘가정 밖 청소년’도 다르지 않다. 이제 이 용어를 바탕으로 주변의 청소년들을 살펴보자. 이누이트족이 400개의 낱말을 통해 눈의 색깔을 다르게 보듯, 우리도 아이들이 앓는 성장통들의 다양한 결들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배려는 바라보고 공감하는 데서 시작된다. 주변에 늘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던 가정 밖 청소년들을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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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복 님은 중동고 철학교사로 청소년들에게 철학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함께 고민을 나누고 응원을 보내고 있다.

〈열일곱 살의 인생론〉, 〈열일곱 살의 욕망 연습〉 등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저서를 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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