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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만난사람 [2016.08] 고난을 넘어 희망으로(여명학교 조명숙 교감)

글 정라희 사진 이강훈

 

조명숙 1



┃  북한이탈청소년의 어머니


자그마치 20년이다. 북한이탈청소년을 사랑으로 감싸 안고 지금껏 그 길을 걸었다. 북한이탈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 '여명학교'의 조명숙 교감은 '북한이탈청소년의 어머니'로 불린다. 그 바탕에는 '공감'이 있다. 빈민촌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소외된 자'의 아픔을 절절히 이해한다.


  북한이탈청소년은 단지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극도의 식량난과 사투를 벌이며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은 아이들이다. 하지만 힘들게 한국에 와서도 정착 과정에서 문화와 생활환경 차이로 또 다른 어려움에 부딪힌다. '북한에서는 배고파서 못살겠고, 한국에서는 몰라서 못살겠다'는 말은 북한이탈청소년들에게는 우스갯소리가 아닌 현실이다. 한국에서 제대로 살려면 많은 것을 새로 배워야 한다. 조명숙 교감이 북한이탈청소년의 교육에 관심을 둔 배경이 여기에 있다.


┃  선택하지 못한 자의 아픔에 공감하며


조명숙 교감은 스스로 '빈민촌 출신'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대통령 선거 때면 어김없이 후보자들이 그녀가 살던 동네를 방문했다. 학용품을 받아 들고 좋아하던 모습이 텔레비전에 방송되기도 했다. 가난에 찌든 동네 아이들의 진로는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불량배로, 유흥가로 빠지는 이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빈민촌에 있는 아이들은 더 어렵게 살 확률이 높아요. 상대적 빈곤감도 더 커지죠. 그 격차를 뛰어넘는 대안이 교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삶을 바꾸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대학에 가기보다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길 바랐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그의 결정을 지지해줬다. 고3이 되어 뒤늦게 시작한 공부라 삼수 끝에 단국대학교 한문교육과에 합격했다. 그 동네 '여대생 1호'였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 대학교 3학년이던 1993년 초, 집으로 잘못 걸려온 외국인노동자의 전화를 받았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외국인노동자의 요청을 지나칠 수 없어 안면도 없는 그를 찾아 병원으로 갔다.


  잘사는 나라의 빈민보다 못사는 나라의 외국인노동자들이 더 어렵게 보였다. 교사의 길을 접고 외국인노동자를 돕는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1997년, 신혼여행으로 중국에 갔다가 한국의 빈민보다, 외국인노동자보다 더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만났다. 탈북자들이었다. 중국 교포의 소개로 처음 만난 탈북자들은 핏기 없는 얼굴에 공포에 질려 있었다. 당시 북한은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 등으로 최악의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북한을 이탈하는 주민의 숫자도 점점 늘어났다. 탈북자들은 생존하고자 북한을 벗어났지만 정치적 이유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 중의 약자였다.


  “빈민촌에서 태어난 건 제가 선택한 일이 아니었어요. 만약 자신이 선택했다면 그 결과를 감수해야 하지만, 선택하지 않은 일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도 저는 나라를 잘 만나 공부해서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었지만, 탈북자들은 부모는 물론 나라도 자신이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면에선 가장 어려운 사람들 아닌가요?“


  같은 얼굴을 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북한이탈주민을 돕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처음에는 전혀 다른 사회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들과 부딪치기도 했다. '같다'고 생각했지만 외국인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외국인노동자를 도울 때는 '무엇이 다른가'에 집중했어요. 그래서 다르기 때문에 무엇을 조심해야 하고, 어떻게 격려하고 끌어줄지 생각했죠. 그런데 탈북자들을 보면서는 그런 배려 없이 '나와 같다'라고만 생각했죠. 그런 시행착오를 오랫동안 겪었습니다.”



조명숙 2



┃  여명, 새벽 동트기 직전


2002년부터는 한국에 먼저 온 부모를 만나러 탈북청소년의 유입이 더 늘어났다. 하지만 경쟁에 익숙한 한국 아이들과 같은 학급에서 공부하는 것은 북한이탈청소년들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 아이들에게 맞는 교육과정이 절실했다. '새벽 동트기 직전'이라는 뜻을 지닌 '여명'이라는 이름의 학교를 세웠다. 2004년 설립한 여명학교의 역사 속에는 북한이탈청소년들과 웃고 울어온 조명숙 교감의 인생도 담겨 있다.


  “학교 설립 초창기에는 자다 깨서 경찰서에 간 적도 많아요. 북한과 다른 한국의 사회규범을 몰라 문제가 되는 줄도 모르고 사고를 치는 아이가 많았거든요. 별의별 사건으로 속 썩이던 제자가 있는데, 얼마 전에 보니 전기 기술자가 되어 공사 현장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더라고요. 설령 지금 말썽을 부려도 이 아이가 언제 어떻게 달라질지 몰라요. 그래서 현재 모습으로 아이들을 재단하지 말자고, 저 자신도 늘 다짐합니다.”


  그사이 여명학교 졸업생 수도 207명이 됐다. 설립 당시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는 헛말이 됐지만,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운영하는 일은 쉽지 않다. 북한이탈청소년을 돕는 일에 색안경을 낀 어떤 이가 '밤길 조심하라'며 협박전화를 걸어오는 일도 다반사. 여느 사람이라면 심장 떨려 포기했을지도 모를 이 일을, 그녀는 강단 있게 이어가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아이들을 향한 '사랑' 때문이다.

“만약 이 아이들이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겪었을까요. 그 생각을 하면 너무 안타까워요. 엄마 아빠가 없는 아이가 많아서 때로는 제가 부모 역할도 감당해야 합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한국으로 건너온 북한이탈청소년들은 마음의 상처가 많다. 낮에는 환하게 웃으며 뛰어놀다가도 밤이면 “무섭다”며 울기도 한다. 조명숙 교감도 북한이탈주민의 한국 이주를 도우며 몇 차례 위험한 순간을 넘겼다. 당시 경험은 지금 돌아봐도 아찔하지만, 덕분에 북한이탈청소년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



┃  배려보다 강한 '진심'의 힘


사랑의 구성 성분에는 웃음과 눈물이 함께 있다. 아이들의 변화와 성장에 웃음이 번지면서도, 그 아이들이 겪었을 아픔을 돌아보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솟는다. 북한이탈주민 중에는 가족 간 갈등을 겪는 사례도 적지 않다.


  “북한에서는 아버지에게 배급을 줘서 감시를 피하?나 강제혼인 등 말 못할 고초를 겪기도 합니다. 어렵게 한국에 와서 자녀들을 데리고 오면, 만나서 좋기는 하지만 또 다른 갈등이 남아 있어요.”


  목숨을 걸고 한국에 와서 성실하게 돈을 모아 자녀들을 데리고 오지만, 몇 년씩 떨어져 지내며 쌓인 원망과 서먹함으로 인해 몇 마디 말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미처 말하지 못하는 가족 사이의 진심을 나름의 방식으로 통역하는 것도 조명숙 교감의 몫이다.


  “엄마는 엄마대로 미안해 속이 상하면서도 아이를 혼내지 못하고 울기만 해요. 반대로 아이는 '원래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하고 자책하죠. 저도 제 자녀들과 매일 싸우고 화해하며 서로를 알아가는데, 그들에게는 그런 과정이 없었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아이를 달래지 않고 '엄마 대신 혼내는 거야' 그러고 시원하게 욕을 해줘요. 그러면 아이가 '선생님, 고마워요. 받을 벌을 받은 거 같아요'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전화해 '제가 어머니 대신 세 배로 혼냈습니다' 하고 '오늘 집에서 맛있는 거 좀 해주세요'라고 말해요. 그러면 다음 날 엄마와 화해한 아이들이 정말 행복한 얼굴로 학교에 옵니다.”


  좋은 수업을 하려면 기술이 필요하지만, 여명학교 교사로서 더 중요한 태도는 진심이다.어려운 환경에서 눈칫밥을 먹었던 아이들은 사람의 진심을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 조명숙 교감은 “북한이탈청소년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배려보다 동감”이라고 말한다.


조명숙 3



┃  경계를 넘어선 사람 사랑


북한이탈주민이 '미리 온 통일'로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지만, 조명숙 교감은 여전히 편견과 싸우고 있다. 스물셋 어린 나이에 외국인노동자를 돕는 활동가로 나선 그녀를 두고 '좋은 일 한다'며 칭찬하던 이가 많았지만, '탈북자를 돕는다'고 하니 전과 다른 눈으로 보는 이들이 생겼다. 그제야 누군가를 돕는 일에도 정치적 진영 논리가 작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인권은 가장 비정치적인 영역이어야 하는데도, 가장 정치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이 더 힘들죠. 정치적 입장은 각자의 선택과 관점일 수 있지만, 그로 인해 최악의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도울지 말지를 결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희생할 수 있는 인권은 없습니다. 특히 학교는 더욱 중립적인 공간이에요. 인도적인 방법으로 명분을 가지고 아이들을 체계적으로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북한의 인권과 남북의 평화 협상 중 어느 한쪽도 외면할 수는 없다. 조명숙 교감은 “어려워도 두 가지를 양립해서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해 여명학교에 독일의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이 방문했습니다. 동독 출신인 가우크 대통령이 하는 말씀이 '1989년 1월만 해도 내 생전에 통일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해요. 우리도 통일을 기정사실로 보고 준비하는 게 더 현명하다고 봅니다. 독일은 통일 이후 통합에 에너지를 많이 써야 했지만, 우리에게는 통일 이전부터 함께 살고 있는 북한이탈주민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대상으로 통합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이탈청소년들은 통일 시대에 남북을 잇는 중요한 가교가 될 것이다. 조명숙 교감은 그 아이들을 지금보다 더욱 잘 교육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학교 공간 이전 문제 하나에도 제도 개선과 기금 마련이라는 만만치 않은 과제가 놓여 있다. 그럼에도 지금껏 그래왔듯 조명숙 교감은 흔들림 없이 앞을 향해 또 한발 내디딘다. 그 걸음걸음이 북한이탈청소년들이 걸어갈 새 길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라희 님은 전문 인터뷰어로 사람과 산업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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