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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16.08] <유럽인권재판소 판결 읽기 8> 정신장애인은 법적 능력이 없다?

글 박성철 그림 이한수

 

정신장애인은 법적 능력이 없다

┃  당사자 없이 법률행위 능력 박탈


청구인은 1982년에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고 있는 러시아 사람이다. 정신장애(a mental disorder)를 앓고 있다는 이유로 2004년 어머니의 신청에 의해 법률행위 능력을 박탈당하는 재판을 받았다. 청구인은 법원에서 아무런 통지를 받지 못했다. 재판이 열리는지도 몰랐다. 고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진행되는 절차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내지 못했다. 참석도 당연히 하지 못했다. 러시아 민사소송법(the Code of Civil Procedure) 제284조에 따라 청구인이 부재한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되었다. 재판은 10분 만에 끝났다. 심판 대상자의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사정이 있으면 대상자가 출석하지 않아도 그의 권리 능력을 박탈하는 재판을 열 수 있는 예외 조항에 따라 서류 심사만으로 끝났다.


  청구인은 나중에야 자신의 법률행위 능력이 박탈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후견인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청구인은 자신의 법률행위 능력을 박탈하는 재판의 효력을 다투고자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미 법률행위 능력이 없는 사람의 청구라는 이유로 본안 판단을 받지도 못한 채 각하되었다. 청구인은 자신의 법률행위 능력을 박탈한 재판의 효력을 부인하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모두 실패했다.


  청구인은 후견인인 어머니의 신청으로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되었다. 청구인은 정신병원에서 나가기 위해 다시 다투었다. 정신병원에 구금되는 것이 러시아 민사소송법과 정신건강법(The Law on Psychiatric Care)에서 정한 절차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자의에 반해 강제로 입원시킬 경우에 준수해야 하는 적법절차에 어긋난다고 다투었다. 절차적, 실체적 위법성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지만, 이마저 결국 실패했다.


  청구인은 병원에 격리된 동안 친구의 방문을 금지당했다.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도 행사하지 못했다. 병원에 구금되어 있는 동안, 변호사와의 소통도 완전히 차단됐다. 개인적인 소지품을 빼앗기기도 했다. 밖으로 나가는 것도 제한당했다. 말 그대로 강제구금이었다. 입원 사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달라고 당국에 요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이런 여러 인권침해에 대해 병원에 문제 제기를 하고 질의했으나,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했다.


┃  유럽인권재판소, 인권침해 인정


병원 측은 청구인을 상대하지 않았다. 청구인이 법률행위를 할 수 없는 행위무능력자라는 이유였다. 청구인의 의사 결정은 모두 후견인이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청구인은, 자신의 법률행위 능력이 박탈되는 데에 아무런 의견을 내지 못한 채, 급기야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행위능력을 회복하려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마지막 방법으로 유럽인권재판소(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에 제소했다. 유럽인권협약(The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제5조 신체의 자유, 제6조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침해당했다는 이유로 유럽인권재판소에 제소했다[Shtukaturov v. Russia, App no. 44009/05(ECtHR, 27 March 2008)].


  유럽인권재판소는 청구를 받아들였다. 유럽인권협약에 규정된 인권침해를 인정했다. 위반을 인정한 조항도 여럿이다.


  첫째, 청구인의 신체의 자유(제5조 제1항)가 침해되었다고 보았다.

  강제 입원이 위법하다는 뜻이다. 청구인에 대한 입원 결정은 그 당시의 건강 상태를 객관적이고 면밀하게 검사한 결과를 토대로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병원은 입원 대상자가 행위무능력자라는 이유로 어머니인 후견인의 의사에 따랐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인권재판소는, 청구인의 건강 상태가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정도인지 불분명했는데도 강제구금을 한 것은 유럽인권협약 제5조 제1항에 위반된다고 인정했다. 나아가 청구인은 자신이 의사에 반해 강제로 입원되자 구금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제 절차를 밟으려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는데, 청구인이 행위능력을 박탈당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구금에 관한 법적인 구제를 요청할 수 없었던 것 역시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둘째,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제6조 제1항)도 침해되었다고 판단했다.

  청구인은 자신에 대한 법적 능력을 박탈할지를 결정하는 재판인데도 절차 진행에 대해 전혀 고지받지 못했다. 심리 절차는 청구인에게 통지되지 않았다. 청구인이 없는 상태에서 10분 만에 끝났다. 법관은 청구인의 건강 상태를 보지 않았다. 어떤 진술도 듣지도 않았다. 그저 서면만 보고 청구인의 법률행위 능력을 박탈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이런 비합리적인 재판은 당사자주의를 위반해 유럽인권협약 제6조 제1항에 규정된 권리를 침해했다고 보았다.


  셋째, 사생활을 존중받을 권리(제8조) 침해도 인정했다.

  러시아의 관할 지방법원은 청구인의 무능력 정도를 판단할 때 자료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 부실한 의료 기록에만 근거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러시아 법원이 청구인의 정신장애 정도나 행동 양태를 세밀히 확인하지 않은 것을 심각한 인권침해로 보았다. 나아가 설령 정신장애가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그 이유만으로 법률행위 능력을 전적으로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정신장애의 정도가 법적 능력을 완전히 박탈할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고 판시했다.


┃  경계인에 대한 대안적 조치 필요


아울러 법률행위 무능력자를 규정하는 러시아 민법의 근본적인 한계도 지적했다.

  러시아 민법은 법률행위에 대해 능력자와 무능력자 두 개의 범주로 나눈다. 중간 지대는 없다. 경계인에 대한 대안적 조치가 없다. 그렇다 보니 정신장애로 인해 정신 능력에 문제가 있는 성인에 대한 조치는, 그 정도에 관계없이 단 한 가지, 법적 능력을 전적으로 박탈하고 후견인을 선임하는 방법뿐이었다. 중간 지대에 있는 이들에 대한 조처를 마련할 수 없다. 이처럼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유럽인권협약에서 요구하는, 입법 목적에 합치하는 비례성을 갖추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인권재판소는 러시아 민법의 획일적이고 단순한 제도로 인해 정신장애인에 대해 유럽인권협약을 침해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쉽다는 문제를 설명했다. 정신장애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사생활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면서 국가가 개입하는, 입법 목적에 비해 과도한 수단이 남용되기 쉽다고 판단했다. 달성할 수 있는 공익에 비해 사익 침해가 더 커지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덧붙여 이 사건에서는 한소는 청구인의 재판받을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청구인과 청구인의 소송 시설을 제공하도록 임시 조치를 명하는데, 러시아 정부는 계속 거부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이러한 러시아 정부의 임시 조치 거절 행위가 별도의 인권침해 행위라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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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철 님은 변호사로 법무법인 지평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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